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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1. 2021

거리로 봄들이 나왔다

2020년 3월



집에만 있는 것이 괴로워 마스크를 쓰고 산책을 나갔다.


마스크를 쓸 때 생각한다. 이번 산책은 왕복 두 시간을 예상하니, 그렇다면 이 마스크는 앞으로 여섯 시간 정도를 더 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오늘처럼만 잠깐씩 쓴다면 앞으로 4일 정도는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어디선가 마스크의 1일 1회 사용 기준이 여덟 시간이라는 소리를 듣고 꾸역꾸역 계산을 해 본다. 마스크 겉면에 붙어 온 혹시 모를 어떤 바이러스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이는 꼴은 아닐까? 마스크를 벗거나 다시 쓰다가 외려 바이러스를 여기저기 묻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마스크 한 장을 쓰려다 말고 멀거니 거울을 보았다.

내 몸 안팎에 들끓고 있을 수많은 바이러스들에 대항하는 가장 위대한 예방책이 이 얇고 작은 마스크라니. 커다란 몸뚱이로 살아온 시간과 착실히 쌓아온 몸무게와 그에 비례하게 뿜어낸 어마어마한 쓰레기들의 양에 비해 너무나 가냘프고 작은 것에 의존하고 있는 내가 문득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은 가장 무력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그러니까   

 

가장 커다란, 답 없는, 종국적인  바이러스인 주제에-


잠시 머뭇대다가 결국 마스크를 쓴다. 그냥 쓰는 게 아니라 티브이가 가르쳐 준 대로 코 부분을 꼭꼭 눌러 얼굴에 밀착시킨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몇 번이고 거울을 확인한다. 대문을 열며, 다시 집에 돌아온 내가 조심스럽게 끈 부분만 잡고 마스크를 벗어 그 무엇도 오염시키지 않을 최선의 각도를 찾아 보관하는 장면을 그려 본다. 내친김에 그다음 날의 풍경도 그려 본다. 약간은 찜찜해하며 다시 최선을 다해 마스크를 쓰고 이리저리 확인하는 나를.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상쾌하다. 사람들은 부러 멀찍이 떨어져 걸어들 다닌다. 어쩔 수 없이 스쳐갈 때는 최대한 닿지 않도록 휘릭 스친다. 뉴스에서 강조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물리적 거리두기'와 '심리적 거리두기'를 포함한 개념인가 아닌가. 다양한 종류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앞만 보고 달리듯 걸어가는 풍경은 얼핏 재난영화 같다. 재난은 재난인데 또 하늘은 미치게 푸르고 바람은 미치게 불고 약국 앞의 줄은 미치게 길어 미치겠는 사람들이 미치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하고 있는 그런 풍경이랄까.


일부러 자주 가던 도서관 쪽으로 쭉쭉 걸었다. 닫혀 있겠지. 1월에 빌린 책의 반납 기한이 얼마 전에 보니 3월 중순까지로 연기되었다. 계획대로라면 한 권당 다섯 번은 족히 읽었을 시간이지만 어떤 책은 첫 장을 들춰 보지조차 않았다. 방학이 길다고 숙제의 퀄리티가 올라가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중에 한 책은 옆동네 도서관에서 상호대차 시스템으로 빌려온 것인데, 역시 책 표지만 정독 중이다. 독서모임의 선정 도서였는데 모임도 무기한 연기. 반납도 연기. 연기에 연기를 더하니 모든 게 정말 연기 속으로 빠져 버리기라도 한 듯 불투명해져 버렸다. 사람이 오랜 시간 갇혀 있다 보면 이런 뻘 소리도 제법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쓰게 되는 모양이다. 좁쌀 한 톨만큼의 사소한 발견.



까마득히 닫힌 도서관을 지나 골목 사이사이로 접어들어 작은 공원을 지났다. 나무 사이로 하늘도 쓱쓱 지나고, 오후도 쓱쓱 지났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공원 안에 사람들이 제법 북적인다. 하얗고 조그마한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 넘게 가린 조그만 꼬마들이 지치지도 않고 달린다. 웃는다. 그네를 탄다. 모래성을 쌓는다. 킥보드가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가고, 엄마 손을 놓은 아이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간다. 한쪽에서는 커다란 마스크를 한 엄마와 아빠가, 작은 마스크 속의 딸아이가 하는 말을 듣느라 귀를 쫑긋이고 있다. 쭈그려 앉은 셋의 앞에는 딸아이가 모았음직한 돌멩이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다. 하나하나 짚어가며 돌멩이에 대해 설명하는 서너 살 아기. 그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엄마 아빠는,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나온 것일까. 이 세상 밖으로. 세 명 분의 마스크를 골라 짚으며. 바람이 이렇게나 부는데 아기의 말이 잘 들릴까?


그런 건 상관없다. 옛날에 울 엄니는 5층 높이의 집에서 파를 썰다가도 놀이터에서 울음을 터뜨린 오빠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챘다고 하셨다. 특정한 음파에 유독 민감해지는 것은 무언가를 초월한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초능력일까. 부모가 된다는 것은 확실히 어떤 것을 초월해 버리는 일 같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으앙- 하고 어떤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벤치에 앉아 있던 여자 하나가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수많은 아이들의 머리 위로 쏟아질 듯 파란 하늘이 서고, 봄볕이 내려앉았다. 그 아래에서 아이들은 하나같이 마스크를 쓴 채 그네를 타고 뛰어가고 울음을 터뜨리고 깔깔 웃었다. 이 모든 장면은 무척 자연스러운 동시에 무척 이상했다. 자유로운데 자유롭지 않고 즐거운데 즐겁지 않으며 신이 나는데 신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슬프지 않은데 슬펐다. 나는.



어느 즈음에서 다시 방향을 돌려야 할지 몰라 불쑥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주인장은 니트릴 위생장갑을 낀 손으로 카드를 받았다. 커피를 받아 들고 카페를 나서는 동안 카페의 손님은 나 혼자였다. 모든 것이 흘러가는 동시에 멈추어 있다. 끊어진 듯 이어지고 있다. 자연스러운 듯 부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파편화된 모든 것들이 다시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가 온전한 하나의 풍경으로 완성되는 것은 언제일까- 생각하며, 마스크를 턱으로 잡아당긴 뒤 커피 한 모금을 쭉 마시고는 재빨리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아이들이 봄바람처럼 지나간다. 키가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고 있는 소년소녀들도,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친구들과 어깨를 겹친 채 건들건들 지나간다.


거리에 봄이 왔다.

 아니, 거리로 봄들이 나왔다.


산책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졌다. 멀어질수록 기뻤고 가까워질수록 기뻤다. 어느 쪽이든 기뻤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끈 부분을 잡고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벗었다. 오염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해 최선의 각도로 보존 가능한 형태를 찾으려다가 대충 접어 구석에 내려놓았다. 오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스크를 이렇게 보관하면 된다고 했나 안 된다고 했나. 그렇게 말한 건 티브이였나 스마트폰이었나 라디오 뉴스였나 무엇이었나.   


무엇이었든,

거리에는 이미 봄들이 나왔다.  

나와서, 어떻게든 이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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