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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an 19. 2022

평생을 나랑 살고 있는데

서울 낙산공원



인간은 왜 높은 곳에 오르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려면 적어도 산에는 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리산, 한라산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뒷동산 정도는 다녀와야지 지금 공원이 다 뭔가! 낙산공원?? 낙산공워언??!


그렇다. 낙산공원에 다녀왔다. 세상이 서서히 갈빛으로 물드는 시간, 친구 수와 함께였다.

오래전 두어 번 다녀갔던 기억이 있지만 어느새 희미해졌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여기에서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빛이 들어간 필름처럼 풍경은 지워지고 한쪽 귀퉁이에 '낙산공원'이라는 글자만 남은 느낌이다. 지워진 자리에 새롭게 오늘의 풍경을 그려 넣는다. 이렇게 보니 제법 높다. 멀-리, 시간을 따라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시간을 걸어 이곳에 도착했을까.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꼬박 37년 7개월이 걸렸는데. 아주 길고, 무척 짧은 시간이다.  


언젠가 버스에서 낯 모르는 이가 내 옆에 앉다가 기우뚱하며 서로의 손이 스친 적이 있다. 그때 잠시 곁에 앉아 가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타인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몇 년 동안을, 어떻게 살아온 사람일까. 어제는 어디에 있었고 오늘은 어디로 가는 중일까. 내일은 다시 어디에 있을까. 바로 직전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타인의 인생이 어쩌다 내 인생과 겹쳐 버린 그 짧은 시간. 이상했다. 서로에게 별 의미 없는 풍경으로만 존재하다가 금세 다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이상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뜬금없이 만나 몇 분 후면 기억에서도 사라질 찰나의 순간만을 함께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렇게 다시 멀어져 버린 후에는 영영 못 보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갔고, 나도 스쳐왔다. 지금도. 계속해서.


낙산공원에 올라 저 편을 건너다보며 0.8의 시력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무수한 타인의 삶들을 떠올렸다. 볼 수 없으니 알 길이 없고, 알 길이 없으니 알 수도 없다. 진실로 겉만 보고 있다. 겉만 보기 때문에 좋아 보이는 것일까. 나는 내 삶 하나만을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을 뿐이다. 37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겨우겨우 내 세상 하나만을 보고 있다. 좀 더 확장한다고 해도 내 주변 사람들과 가족, 친구 정도일까. 하지만 결국 가족도, 친구도 타인이고, 타인의 삶이다. 이따금씩 말할 수 없는 고독감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오랫동안 삶을 살고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이 어떤지 앞으로 어때야 하는지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자신에게조차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애초에 설명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설명서를 겨우겨우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 설명서는 날마다 바뀐다. 새롭게 쓰고 지우고 버리고 다시 만들기 때문에 어제의 설명서로 오늘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 오늘 잘 써먹은 설명서가 내일 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살다 보면 설명서를 아예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도 많다. 평생을 나랑 살고 있는데,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 한순간 정전이 된 듯 막막하고 깜깜해져 버리는 것이다. 평생을 나랑 살고 있는데, 내가 나를 모르다니! 어서 촛불이라도 찾아서 켜야 하는데 망연해져 있다 보면 그런 생각도 잘 안 든다.  


인간 존재와 삶의 고충은 여기에서 오는 것일까.

설명되지 않는 내 존재를 설명하려니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이해해 보려니 괴롭다. 무수한 타인의 삶 속에 어설프게 끼어 있는 내 삶이 문득 희미하고 위태롭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이렇게 어설프게 존재해도 괜찮은 건가. 어설프고 희미한 존재들은 무엇으로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아니, 꼭 가치를 증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저 살아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치이고 증명일까. 그저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으면, 그럼 괜찮을까.


위태로운 순간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온다. 그 순간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되려 꽉 붙들어 어떻게든 읽어내는 것. 그래서 올해 다시 내 삶의 설명서를 새롭게 쓰는 것. 그렇게 이번 해의 삶 또한 잘 스쳐 보내는 것이 2022년의 내가, 나에게 바라는 일이다.


인간이 높은 곳에 오르는 이유는 그래서 뭘까?

평생을 같이 살고 있는 나랑 좀 더 친해져 보려고, 잠시 불화한 순간이 있었다면 화해해 보려고. 무수히 많은 타인의 삶 속에 그래도 한 자리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나, 어찌 되었든 오늘도 살고 있는 나를,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해. 저기 좀 보라고, 저기 좀 보라고. 혹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바람을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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