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주 Jan 20. 2022

나는 피너츠에 관심도 없는데

굿윌스토어 피너츠 그릇



그러니까, 그게-

그릇을 사려던 건 아니었다. 그것도 피너츠. 피너츠 그릇이라니! 나는 피너츠에 관심도 없는데!


그냥 하루 종일 너무 집에만 있는 것 같아 소화도 시키고 바람도 쐴 겸 산책을 나간 참이었다. 산책로의 중간에 옆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샛길이 있는 것도 알고, 그 길을 조금만 따라 올라가면 '굿윌스토어'가 있는 것도 알았지만, 이사 와서 아직 한 번도 안 가 봤는 걸? 그리고 산책을 나갈 때는 늘 빈 손인 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 산책이지. 암암.


그런데 왜 그런 걸까. 오늘 바람이 너무 불어서 그랬나, 벌써 1월 중순이라 공연히 마음이 쓸쓸해서 그랬나. 나갈 준비를 하면서 혹시 붕어빵이 먹고 싶어질지도 모르는 미래의 날 위해 현금 이천 원을 주머니에 슝!(그냥 배가 고팠던 것 같...)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체크카드 한 장도 주머니에 띠링 흘려 넣었다. 그러고는 신나게 출발!


얼마나 갔을까. 바람이 머리를 신나게 두들기며 휘황찬란한 댄스를 선보였다. 어찌나 막춤인지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시렸다. 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란 역시 이런 때 쓰는 말일까?(그냥 더 이상 걷기가 싫었던 것 같...) 두 귀를 감싸 쥐고 눈앞에 보이는 샛길로 도망쳐 버렸다. 우다다다 걷는데 코앞에 굿윌스토어가 나타났다. 땅거미가 진 지 오래인데 다행히 아직 문이 열려 있었다. 오, 여길 들어가 볼까. 생각도 하기 전에 이미 발은 가게 안으로 이보 전진!


굿윌스토어는 밀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인 듯하다. 사람들이 기증한 물건들을 깨끗하게 포장하고 진열해 다시 필요한 사람들이 이를 좋은 가격에 구할 수 있도록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들이 일을 통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주된 목적. (잘 몰라서 찾아보았다) 어디이든 무엇이든 선한 목적이 선하게 남아 의롭게 쓰이면, 모두의 삶이 변화하겠지. 좋다. 그간 지나만 다녔지 직접 가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들어서자마자 구경하기에 바빴다. 책도 많고, 옷도 많다. 매장이 넓어 구석구석 요모조모 다양한 물건들을 살피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피너츠 그릇을 발견했다. 원래 그릇에 큰 관심이 없어서 그냥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릇 안에서 웃고 있는 스누피와 바깥의 찰리 브라운이 자꾸 발길을 붙잡았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생각보다 얇은데, 의외로 단단하고 견고하다. 원 가격이 꽤 비싸다. 메이커라 그런가? 그러고 보니 코렐이라고 쓰여 있다. 코렐? 이거 좋은 거 아닌가? 안 깨진다고 하는 그릇 아닌가? 괜히 막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격도 막 절반이다. 50%나 세일이네? 음, 에이- 그래도 내가 이걸 어디다 쓴담. 괜히 또 사놓고 후회하지. 중얼거리며 돌아서는데 왠지 사고 싶은 것이다. 국그릇으로 쓰면 좋을 두 개의 피너츠 그릇을 결국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데, 저 쪽에서 직원분이 흘끔흘끔 보신다. 지문만 잔뜩 묻히고 안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좀 그렇지? (그렇긴 뭐가 그렇...) 국그릇 두 개를 들고 나오는데 다른 칸에 이번에는 '피너츠 접시'가 있다. 오호! 세 군데로 나뉜 접시라! 뭘 담으면 좋을까. 오징어채 딱! 견과류 딱! 건조 과일 딱! 그리고 맥주 한 잔을 딱! 딱딱딱! 딱 떨어지네 정말.


이것만 산 게 아니다. <공중그네>를 비롯한 책 네 권도 샀다. 거기에 피너츠 그릇 세 개를 같이 들고 낑낑대며 밤길을 걸었다. 책은 함께 구매한 종량제 봉투에 넣고, 그릇은 깨질까 봐 손에 들었다. 롱 패딩에 캡 모자를 쓰고, 책 네 권이 든 종량제 봉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피너츠 그릇을 들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러는 걸까요. 대체. 나는.


뭐,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굿윌스토어가 좋았으니까, 그것으로 됐다. 견고하고 예쁜 그릇도 생겼고, 읽고 싶었던 책들도 아주 좋은 가격에 샀으니 무척 훌륭한 시간이었다. 비록 앱에 찍힌 걸음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하나 더. 나는 피너츠에 큰 관심이 없지만, 피너츠에 큰 관심이 있었던, 피너츠를 너무너무 좋아했던 친구가 있다. 피너츠 캐릭터를 좋아해 피너츠라면 무엇이든 하나 둘 모으던 친구가 있다. 언젠가 여기에도 언급한 적 있는 B다.   


아마 B가 있었다면, B에게 주려고 샀을 것이다. 이 그릇들도. B는 어쩌면, 벌써 가지고 있다며 나더러 사지 말라고 했을 수도 있겠다.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아직 없어도 사지 말라고 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어어 알았어 안 살게, 라며 기어코 샀겠지. 그릇은 많을수록 좋다며. 아마 내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피너츠이니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 나는, 관심도 없는 피너츠를 사는 일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도 피너츠는 우리 집에서 좀 더 세력을 넓혀 갈 것 같다. 정작 주인은 관심도 없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귀가 얇아 화이자 3차 맞고 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