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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17. 2022

희미하고도 짙은

슬픔에 대한 감각


부산한 오전이 지나고 바쁜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오후. 2학년 수업이 끝나고 들어가는 길에 2학년부 교무실에 들렀다.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동교과 김 선생님께서 문득 '엄샘도 같이 가요.' 하셨다. 네? 어디를요? 우리 낼모레 일과 마치고 가을 나들이 가기로 했거든요. 오! 저도 가도 되나요? 그럼요. 목적지는 학교 인근의 숲길.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주변 경관이 참 아름답다. 학교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숲길이 길게 이어져 보이는 곳마다 흙과 나무다. 도시이지만 도시 같지 않은 풍경들에 금세 숨통이 탁 트인다. 우리 아이들이 유달리 순하고 둥근 것은 그 때문이리라 자주 생각해 왔다. 돌이켜 보면, 자연 가까이에서 계절의 흐름을 목도하며 자라는 아이들은 대부분 그랬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꿈이 있든 없든 목소리가 크든 작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자주 웃었고 수줍게 인사했고 사람에게 애틋했다.


며칠 후 금요일. 2학년부 선생님들의 나들이에 끼어 나도 학교를 나섰다. 이 선생님의 차를 타고 교외로 조금 달리니 금방 걷기 좋은 숲길이 나왔다. 저물 녘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약간 흐린 날씨. 우리는 숲길을 걸어 안쪽으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고르게 분포한 숲은 빛깔도 다양했다. 한쪽은 붉게 다른 한쪽은 노랗게 저 앞쪽은 다시 푸르게 일부러 그려도 그렇게 하지는 못할 계절의 색들이 불꽃놀이처럼 아름다웠다. 자박자박 낙엽길을 밟았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질감이 꼭 이럴 것이다. 학교를 다니며 잔뜩 긴장해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김 선생님이 문득 입을 여셨다.


선생님, 있잖아요. 모든 것에 백 퍼센트를 다하려 너무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네?

천천히 하셔도 충분해요. 지금 너무 잘하고 계세요.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교과 교사 경력은 0에 가까운 나를, 어느 날 갑자기 동료로 맞이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 주시고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김 선생님. 선생님도 이번 해에 학교를 옮겨 이 학교가 처음이셨는데 그만 나까지 떠안으신 것이었다. 교직 경력 이십오 년이 넘은 베테랑 선생님께 혹시라도 누가 될까 봐 늘 노심초사하며 안달복달 난리였던 내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 보신 걸까. 선생님은 나의 불안을 매 순간 지극한 마음으로 품어 주시고 달래 주셨다. 아이들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어버버하다가 제대로 답변을 못했을 때에도, 진도가 늦어 허덕일 때에도, 시험 기간에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 봐 초긴장했을 때에도 전혀 문제 없다며 늘 안심을 시켜 주신 선생님. 이 말씀을 전해 주시려고 나를 부르신 걸까. 바람이 불었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자연의 품이란 그런 걸까. 아무 말 없이 그저 걸으며 하늘을 보고 숲 내음을 맡은 것뿐인데도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들은 별다른 말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걸었다. 그러다 예쁜 풍경이 나오면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고 많이 웃었다. 원래 숲길만 걷고 따뜻한 저녁을 한 후 헤어지기로 했는데 시간이 남아 근처에 있는 절에를 한번 올라가 보기로 했다. 차로 얼마나 달렸을까. 산길로 들어서는 길목이 나오더니 꼬불꼬불 한동안 올라갔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 절은 오랜만이었다. 멀리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가을 내내 물이 고인 듯 출렁이던 내 깊은 마음속.

그날은 B의 기일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멈추지 않던 마음속의 파도가 산사의 저녁 그늘 속에서 비로소 조금씩 잔잔해졌다. 저마다의 기도를 올리고 높은 곳에 올라 저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그윽하게 지는 하루가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그때였다. 멀리서 우리를 지켜 보셨을까. 노스님 한 분이(어쩌면 거사님일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 다가왔다. 목소리가 우렁우렁하셨다. 스님은 우리에게 사찰을 둘러싼 바위 산이 '달마 대사'의 옆모습을 닮았다며 보여 주고 싶어 하셨다. 이곳이 천 년 고찰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주위가 자꾸 어두워져 마음이 조급해지는데 스님은 마지막으로 잉어의 밥을 주고 가라 하셨다. 손수 들고 나오신 잉어 밥을 한 줌씩 손에 들고 사찰 아래쪽에 있는 연못에 다다랐다. 가는 사이 백구 두 마리가 졸졸 따라온다. 하나는 해탈이, 다른 하나는 선재라고 한다. 이름 한번 멋있다. 해탈이는 최근에 수술을 해서 사람들이 주는 간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해탈이 간식 금지'라고 쓰인 목수건을 둘렀는데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해탈이가 열두 살, 선재가 두 살이란다. 사찰에 사는 모든 것들은 속세와 떨어져 있어 그런지 참 맑고 정갈하다. 해탈이와 선재가 나보다 더 선지식에 가까우리라.


잉어 밥을 주고 스님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근방의 식당에 들러 따뜻한 국밥을 저녁으로 먹었다. 사람들을 태워 좋은 풍경을 보고 밥을 사 먹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는 이 선생님. 그 마음 덕분에 그동안 가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들을 참 많이 보았다. 그때마다 마음속에 가득 고여 있던 슬픔이라는 감정이 조금씩 희석되는 것을 느꼈다.


산사를 아주 빠져 나오기 전 해탈이와 선재에게도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는데 스님이 소원들을 하나씩 적고 가라 하셨다. 그러고 보니 철망 같은 곳에 빼곡히 사람들의 소원이 나부끼고 있었다. 하트 모양의 메모지를 받아 들고 펜을 쥐었다. 가을날에 내가 빌 수 있는 소원이란 단 하나다. 나의 친구들이 영원히 평안하고 행복할 것.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 그래서 아직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것. 이제 정말 주변이 온통 어스름에 젖었다. 메모를 단단히 철망에 묶었다. 선생님 두 분이 다가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마음속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쓰다듬었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어떠한 설명 없이도 타인에 기댈 수 있었다.


선생님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인디언의 언어로 '친구'는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이며 11월은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는 않은 달'이라고 했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내 슬픔을 나누어 지고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남긴 유산을 바라보며 꿋꿋하게 살아야겠다. 아직은 어떻게 하면 남은 날들을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밤이 깊지만 조금씩 나아지리라.


나는 우리나라가 서로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조금씩 나누어 지고 걷는 그런 사회였으면 좋겠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슬픔이 있고 청년에게는 청년의 슬픔이 있다. 어느 세대나 오직 그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슬픔에 대해 좀 더 섬세해져야 한다. 너무나 개별적인 서사여서 설혹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누어 지는 일은 할 수 있다. 슬픔의 속성을 알아야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잘 몰라도, 속속들이 헤집고 설명하라 다그치지 않아도 우리는 슬픔을 나눌 수 있다. 나눈다고 그것이 줄어들거나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떤 순간들을 좀 더 견디게는 해 주는 것이다. 서로의 슬픔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밤샘작업을 하면 일이 끝난 뒤 오른손을 뻗으려 해도 잘 뻗어지지 않는다. 오늘도 낮부터 계속 쓴 탓에 너무 지쳐서 붓을 놓고 오른 팔꿈치를 요 밖으로 짚고 턱을 괸 채 잠시 쉬었다. 쉬고 있으니 열도 조금 내려서 멍하니 어딘가로 눈길을 줬는데 유리를 끼운 미닫이에 머리맡 램프 그림자가 비쳐 있다. 유리창과 램프 사이 거리는 2미터쯤인데 불빛이 흔들리며 다소 크게 보인다.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눈물이 난다. 그러자 등불이 두 개로 보인다.

                                                    - 마사오카 시키, '램프 그림자' 중 (<슬픈 인간> 70p, 봄날의 책)


올가을은 유독 슬픈 일들이 많았다. 슬픔에 눌리지 않겠다는 다짐은 내게는 허상이다. 나는 자주 짓눌리지만 어떻게든 살아내려 한다. 그리고 삶은 내게 기막힌 타이밍으로 작은 숨구멍을 내어 준다. 그러면 나는 어느 순간 어둠을 뚫고 들어온 그 희미하고도 짙은 한 줄기 빛을 놓치지 않고 붙든다.


그렇게 슬픔의 감각을 지니고서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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