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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20. 2022

한 사람을 기다리며

Yeong


산뜻하고 밝은 가을날 오후. Yeong를 기다리며 쓴다.


'Drei'라는 이름의 카페. 왜 Drei일까. 아인스, 쯔바이, 드라이, 퓌어, 퓐프 하며 숫자를 세던 독일어 수업이 생각났다. 영어에 비하면 턱도 없이 길기만 하던 독일어 단어가 나는 참 좋았다. 제일 좋아하던 단어는 Kugelschreiber. 볼펜. 한 번 외운 후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카페 Drei는, 도착할 무렵에는 사람이 없어 제법 고요하더니 시간이 지나자 둘 셋씩 짝지은 사람들이 합류해 적당히 경쾌한, 대학가의 카페다워졌다. 따뜻한 플랫 화이트를 한 잔 시켰다. 기다리며,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Yeong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중이다. 우리는 늘 가까이에 있었고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했고 젊은 날의 어떤 순간들을 오롯이 나누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리지만 어떤 면은 내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도 넓어서 오래오래 서로의 삶을 지켜주며 살고 싶은 사람이다. Yeong은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늘 그다운 방식으로 연락을 해 왔다. 때로는 카드, 가끔은 엽서. 때로는 뜬금없는 사진 한 장. 어쩌다 카톡 전화. 불현듯 보내온 사진 속에는 언젠가 썼던 일기의 한 구절이나, 내가 어느 날엔가 적어 주고 왔던 메모지의 글 따위가 담겨 있었다. 지나온 지 오래되어 기억에서는 어느덧 사라졌으나 실은 여전히 남아서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증언해 주는 자취들. 어느 날엔가는 '사람이 변하는 일'에 대해 적은 단상을 사진으로 보내 왔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어떤 사람의 일면이 어느 날 문득 완전히 변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내가 알던 과거의 그 혹은 그녀가,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 수 있을까요.


Yeong은 사진 외에 별다른 첨언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렇게 Yeong은 가끔 놀라운 통찰로 마치 당시의 내 삶을 꿰뚫고 있는 듯 그런 글들을 보내 한없이 늘어지던 내 생활에 긴장을 주었다. 그러면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간신히 몇 가지 말들을 골라 메시지를 썼다. 어렵게 띄운 메시지가 서울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짧은 순간, 나는 Yeong이 내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자신의 마음을 놓아준 일이 참 고마웠다. 물리적 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마음의 거리가 멀다면 그것을 진정한 사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Yeong과 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사귐을 오랜 기간 지속해 올 수 있었고, 이는 온전히 Yeong의 덕분이다.


그는 학교가 결정되고 긴 여정을 떠나기 전 나를 불러 근사한 저녁을 사 주었다. 인사동이었고 사찰음식 전문점이었다. 이번에 가면 오랫동안 못 볼 테니까요. Yeong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편지를 보내 온다거나 내가 생각나서 샀다며 나는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화장품들을 선물해 준다거나. 한번은 가을빛으로 물든 세 그루의 나무가 근사하게 솟은 입체 카드를 보내왔다. 이 카드를 보는 순간 생각이 나서요. 정갈한 글씨로 언제나 어디에서나 나의 편이라는 말과 함께. 문득 생각이 나서, 라는 말에 담긴 그의 애정을 나는 높이를 알 수 없는 벼랑을 보듯 까마득한 깊이로 느낀다. 제법 수줍은 그가, 카드를 사고 글을 쓰고 이국의 낯선 우체국을 찾아 편지를 부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할 때- 마음 한구석이 가장 안온한 형태로 정돈되는 것을 느낀다.  


이제 얼마나 왔을까. 세 시에 도착한다는 그의 발걸음이 이제 이곳까지 몇 걸음이나 남았을까. 창이 큰 카페. 창 너머로 그의 얼굴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몇 자를 더 적어 본다. 고마운 마음이야 써도 써도 끝이 없고 나는 오늘 그에게 맛난 점심을 사 줄 작정이다. 늘 빈한하기만 했던 나의 마음을 채워 주었던 사람에게.


<다음 날 마무리>

'사람에게'까지 썼을 때 저 멀리 Yeong이 나타났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일어났다. 두리번거리던 Yeong이 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죠? 그러게. 작년 여름에 보고 못 보았으니 어떤 이야기부터 하면 좋을까. 나는 그가 들어올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느냐고 묻고 신중한 그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하며 여지없이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이제 이런 거 그만 사와도 돼. 밀크랑 다크 중에 어느 것이 좋으세요. 매양 선물을 받는 것이 미안해서 타박처럼 말을 해 놓고 슬그머니 다크 초콜릿으로 손을 뻗는다. Yeong이 빙그레 웃었다. 다크 고르실 줄 알았어요. 우리는 아인슈페너 한 잔을 앞에 놓고 살아가는 일과 행복에 대한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는 이야기. 나는 답을 바라지 않고 던지는 속내인데,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편인 Yeong은 답을 주고 싶어 애쓴다. 그럴 때 고맙고 미안하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갈림길 위에 서서 손만 흔들면 되는데 그대로 한 시간을 더 이야기했다. 내일은 뭐 할 거니? 오랜만에 박물관에 가 보려구요. 박물관? 안 간 지 오래되었거든요.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래. 내일 뭐 하세요? 수업 준비하고 시험 문제 내고. 또 봐요. 그러자.


Yeong에게 김희준 시인의 시집을 선물했다. 엽서 한 장에 몇 줄의 글을 쓰고.


우리는 각자 단편적이고 불충분한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자기가 느끼는 것이 정말로 옳은지 어떤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타자나 사회에 대해 개입한다. 그것이 가닿을지 아닐지는 알지 못하는 채, 끝도 없이 병에 담긴 언어를 바다로 흘려보낸다.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207p


불완전하지만, 불완전하기에 오늘도 우리들은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기다림 속에서 한없이 깊어져 가는 계절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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