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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Feb 23. 2022

누가 보면 지리산 종주인 줄 알겠지만

이백 년 만에 다녀온 등산에 관한 짧은 기록


지난 일요일이었다. 체감상으로 한 이백 년 만에 등산에 나섰다. 보희, 지수와 함께였다.


마지막으로 등산을 한 게, 그러니까 한... 7년. 7년쯤 되었나 보다. 사실 더 되었을 수도 있다. 설마 30대가 되고 처음인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등산'이란 단어가 이토록 익숙한 건 왜일까. 매년 버킷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훌륭한 다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멋진 실패 목록 중 하나이기 때문일까. 한창 패기가 넘쳤을 때는 새해 다짐에 꼭 '10개 산 등반하기'라고 당당히 쓰고 어디선가 들어본 산 이름들을 신나게 나열했었다. 한라산, 설악산, 지리산, 북한산, 인왕산...(왜 백두산이랑 금강산도 쓰지) 뒷동산도 안 오르는 주제에 늘 꿈은 크고 원대해서 다짐하고 실패하고의 반복이었지만 새해가 주는 힘은 어쩌면 그리 강한지. 과거의 실패 따위는 까맣게 잊고 또 한 번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망각은 참 괜찮은 기능이다.


새해가 되고 보희가 '우리 봄 되기 전에 등산 가자!'라는 메시지를 단톡방에 띄웠을 때만 해도 정말로 갈 줄은 몰랐다. '그래!!!!' 1월이니까 새해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 당차게 대답을 하고 달력에 표시를 해 두고서는 잊어버렸다. 보희도, 지수도 다들 별다른 말 없이 2월을 맞았고, 그렇게 약속한 날은 다가왔는데...! 한 일주일 전 즈음 지수가 전화를 했다.


태주야... 많이 춥지 않니?

(너무나 기다렸던 말이다) 야, 장난 아니야. 다음 주가 초절정 한파래.

그치? 아무래도 무리겠지?

(고맙다, 지수야) 완전 무리일 것 같아.


겨울은 너무 추우니 차라리 따뜻한 봄 산행으로 미루자! 우리 둘은 금세 의기투합해 우리들의 다짐을 '실패'가 아닌 '잠정 연기'로 미루어 보려는 찰나, 보희가 제동을 걸었다. 그날을 일찌감치 비워 두었고, 다음 산행은 기약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기로 했을 때 해야 한다(언제까지 다짐만 반복할 텐가!!!). 잠정 연기 실패. 보희의 말에는 어느 하나 틀린 곳이 없어서 지수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은 시무룩한 마음으로 산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웬걸. 준비를 하다 보니 또 신이 난다. 족히 15년은 된 등산화를 신발장 구석에서 꺼내 먼지를 털고(신자마자 밑창이 부서지거나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건 아니겠지), 가장 두꺼운 양말을 꺼내 한껏 목을 당겨 신었다. 오! 이건 마치 반스타킹 수준이군. 귀마개와 장갑, 핫팩, 에너지바, 초콜릿, 보온병에 뜨거운 물도 담았다. 안 가려던 사람 맞는지 원. 믹스커피와 컵라면까지 넣으려다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마지막 두 개는 뺐다. 누가 보면 지리산 종주라도 하는 줄 알겠지만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청계산 매봉. 산행에 익숙한 분들은 한 시간이면 올라가신다고.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소박하게 왕복 3시간 반.


등산 배낭도 없어서 옛날에 들던 사무용 백팩을 메고, 호기롭게 출발했다. 오랜만에 신는 등산화가 어색해 출발할 때부터 이런저런 턱에 걸려 생쇼를 해 가며 간신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곤 보희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우와아아!!! 하고 뛰어가다가 기어코 지하철역 입구에서 대한독립만세 자세로 철푸덕 엎어졌다. 만일 무릎이 도장이었다면 정말 선명하고 확실한 증명이 되었을 것이다. '청계산 입구역에 태주 왔다 감' 쾅쾅!


지수까지 만나 우선 산 입구에서 지도를 보았다. 음... 보희가 우리를 슥 돌아보며 그랬다. 얘들아, 굳이 안 가도 돼. 우리 이제 슬슬 무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너무나 공감이 되어서 고개를 마구 끄덕이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밥만 먹고 가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아서 일단 올라가는(?) 보기로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라산 아니고, 설악산 아니고, 지리산 아니고 청계산 매봉 582.5m. (매봉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단 시작을 하니 어떻게든 올라는 갈 수 있었다. 아직 눈이 안 녹은 길이 많아 조심조심 올랐다. 청계산 매봉은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 오르기가 크게 어렵지 않고, 난이도로 치면 중하 정도라고 한다...지만 우리는 그냥 '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뿌듯하도록. 그래!  생각하기 나름!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는데, 매봉 가까이 다다를수록 계단이 없는 곳이 많고,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운 구간이 많았다. 내려올  어떤 분이 크게 미끄러지시는 것을 목격해 모두들 긴장하고 조심하자며 목청을 높이다가 내가 먼저 주욱 미끄러져 쿠당! 넘어지고, 뒤이어 혀를 차던 보희마저 얼음을 밟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에서  둘을 목격한 지수는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괜찮아???? 우리는 아픔보다 창피함이 앞서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어디 튀어나온 돌에 찧었는지 허리 쪽이 약간 욱신거렸지만 다행히  문제는 없었다. 다만,  후로 엄청 쫄아 벌벌 떨며 내려오느라 시간이 배로   빼고는 모든  괜찮았다. 그래도 정상에서 사진도 찍고 모처럼 산바람도 쐬니 성취감은 컸다.


청계산 입구에서 점심을 먹고 금방 어졌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니 과연 하루가 길었다. 집으로 돌아와 오늘  보나 걸었나 살펴보니  구천  가까이 되었고, 계단 층수로는 164층이었다. ! 평소보다 100배는  올라갔군. 어쩐지. 약간 무릎이 나간  같긴 한데 등산 괜찮네. 무릎이 약간 삐걱거리고 종아리가 미친 듯이 당기고 대퇴부가 욱신거리는  빼고는 괜찮네. 등산 좋네.


우리는 갑작스런 등산의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놈의 성취감 때문에 기어코 다음을 약속했다. 기쁨에 들떠 한 달에 한 번 볼까, 무리한 다짐을 하다가 바로 정신 차리고 세 달에 한 번 정도 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다음은 5월, 인왕산이다. 꽃 피고, 따뜻하고 산도 참 예쁘겠지. 그즈음이 되면 다시 지수의 전화가 올까? 그때 내가 뭐라고 하든 다시 보희의 제동으로 산행에 나서길 바라 본다.


그놈의 성취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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