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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예 Sep 15. 2021

기숙사! 그곳은 온통 핑크빛

연애하려고 왔나요? 네.


막차 끊기기 전에 집에 가기? NO
캠퍼스 낭만, 지금 시작합니다.



인생 첫 본가탈출은 기숙사 덕에 이뤄졌다. 당시 우리 대학 기숙사는 타지에서 살거나 통학 거리가 1시간 이상인 학생들만 입주 신청이 가능했다. 내가 살던 집은 안타깝게도 학교와 매우 가까워 대중교통으로 20~30분 정도면 통학이 가능했다. 그러나 시시한 내 인생에도 드디어 허리케인급 이벤트가 개최됐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신축 기숙사가 완공됐다. 여름방학이 끝난 후 2학기가 되면 이미 웬만한 재학생들은 주거지를 정한 상태일 터, 그래서 2학기 기숙사 입주 인원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나 보다.


<어쩌고 대학 신축 기숙사 오픈>
신청 대상자: 본교 재학생 모두.
한 학기 입주금: 딱 100만원.
-선착순이니 빠르게 신청 바람-


아빠 나도 나가서 살아볼래요, "안 돼." 자취하겠단 게 아니구, "안 돼." 아니 기숙사에서 살 수 있다고요! 끈질긴 독립 구애 끝에 나는 기숙사에 입주하게 됐다. 1학년 내내 동아리 뒤풀이며, 오티 뒤풀이며 재미있는 모임마다 죄다 칼막차 귀가를 했던 내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변화였다. 오후 11시 30분 88번 버스 이제 안타도 된다~ 이거예요. 우하하! 이제 새벽까지 나도 부어라 마셔라 한다 이 말입니다~ 싱글벙글했다. 정말 광대가 터져갈 듯이.



새벽 4시에 들려오는 구토 소리



1) 하늘이 점 지어준 내 룸메, 내 원수!

룸메이트는 한 학번 위 같은 과 선배였다. 우리 사이에서 '공부 좀 꽤 하는' 모범 선배로 불렸다. 필요한 물품을 다이소에서 함께 구매하며 단 꿈에 젖어있었다. 이 언니랑 알콩달콩 즐거운 숙사 라이프 즐겨야지 라고 말이다. 그때는 몰랐죠. 모범 선배도 술을 좋아할 수 있다는 걸.


학과에선 범생이 동아리에선 술꾼, 언니는 술을 제법 잘 마셨다. 적어도 내 기억엔 그렇다. 즐거운 술자리마다 막차를 타고 귀가할 필요가 없는 건 모든 기숙사생에게 똑같이 허가된 축복이었다. 언니는 나보다 더했다. 구에엑, 궤엑! 어찌나 거하게 마셨는지 새벽에 종종 구토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시험기간에도 새벽 4시쯤엔 구토 소리가 들려왔다. "저 언니의 성적 비결은 술토일지도. 새벽에 정신이 확 깨니까." 가끔 무서웠다.


다음날 아침,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전날 언니가 허술하게 치우다 만 잔여물이 있었다... 지금도 물어보고 싶다. 언니, 왜 굳이 술 마시고 와서 짜파게티 컵라면 또 끓여먹었나요. 야무지게 토해놓았더라고요. 하수구 막힌 거 제가 뚫었어요... 몰랐죠...?



2) 지켜라 통금, 어겨라 규칙!


청소 따윈 개나 줘


이판사판, 언니 따라 나도 부어라 마셔라 한 판이었다. 동아리에 학회까지 야무지게 가입해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를 지켰다. 하지만 회사 기숙사든 학교 기숙사든, '기숙사'인 이상 약소한 규칙이 존재한다. 특이 학교에선 '통금 규칙'이 제일 타이트했다. 새벽 2시-5시 사이에는 정문이 잠긴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1시 59분까지 귀가하던가, 새벽까지 달리고 5시 1분에 귀가해야 한다. 나? 호시탐탐 5시 1분에 귀가하려고 선배들을 잡았다. 더 놀아주고 가!


1. 남녀 기숙사를 각자 침범하지 말 것.
2. 점검 기간에 특별히 위생을 지킬 것.
3. 외부 음식을 반입하지 말 것.


자자 모두 어겨봅시다. 질풍노도 21세 여성은 부도덕의 극치를 달립니다. 남자 기숙사를 침범한 건 아니지만 선배들과 장난을 친답시고 몰래 입구까지 가본 적은 있다. 점검 기간에는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 물건을 모조리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투 씨 이즈 투 빌리브, 사감 선생님은 보이는 것만 믿으소서. 보이지 않는 건 모두 허상입니다요. 마지막 세 번째, 외부 음식? 몰래 갖고 오면 더 맛있다. 주로 2인 1조로 픽업을 했다. 일단 볼캡 모자를 푹 눌러쓴다. 그리고 한 명은 앞에서 먼저 걸아가며 망을 본다. 다른 한 명은 백팩을 메고 가 음식을 가방에 담는다. 이 모든 과정은 사방팔방에 CCTV가 설치된 중앙광장에서 이뤄진다. 대체 모자를 눌러쓴 이유가 뭘까. 허술하게 규칙을 어기면서도 우리는 그때 뭐가 그리 좋았는지 "완전 범죄야~" 하면서 낄낄거리곤 했다. 허접한 위장 후 동기 기숙사방에 모여 먹는 치킨은 정말 맛있었다.



3) 연애하러 왔냐? 네.


그 누구도 우릴 분리할 수 업-서-


그래도 기숙사 대망의 하이라이트라면 내겐 바로 이쪽. 정말 주거를 위해 입주한 친구들과 달리 나는 처음부터 불순하다 못해 더러운 의도를 갖고 입주했다. 꿈꾸던 낭만을 즐기고 싶다 이거예요~ 회사 기숙사에선 조금 다르겠습니다만, 대학 기숙사는 정말 온 세상이 핑크빛입니다. 해만 떨어지면 여기저기 시작되는 하트 시그널! 그게 우리에겐 낭만이었다.


곧 2시네..
그러게...
조심히 들어가...
응!
잠 안 오면 연락해 ㅎㅎ 5시 되자마자 데리러 갈게


나이 먹고 기억하려니 소름이 돋네요. 앞서 말했듯 통금이 2시라서 숙사 커플들은 항상 1시 50분~ 1시 59분 사이에 난리부르스를 한판씩 떨어야 했다. 헤어지기 싫다고 옘병 천병을 떨어주는 맛이 있다. 사실 도보로 10걸음? 밖에 차이가 안 났지만 그때는 그 10걸음이 세상 아련하고 가슴 아팠다. 자취하면서 연애를 하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볼 수 있지만 숙사 커플들은 학교 밖 숙박시설을 쓰지 않는 이상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참 아쉽고 아련했다. (별)


정문으로 나와.
왜?
왜긴, 같이 걷자.
12시인데?
2시간이나 걸을 수 있네.
(촴나~ 나오라면 내가 나갈 줄 알아~~?) 좋아


썸 타고 있는 커플들에겐 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든지 불러낼 수 있고 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니까. 늦은 밤 전화를 해도 각자가 Okay라면 10분 내로 만날 수 있다. 대충 후드 뒤집어쓰고 정문까지 쪼르르 나가면 그곳부터 데이트 시작이다. 늦은 밤 모든 불이 꺼진 캠퍼스에는 은근히 사람이 많았다. 벤치 건너 건너 피어나는 분홍빛 세상, 통학 친구들은 모를 낭만이다. 시험기간에도 좋다. 도서관에서 새벽 5시까지 공부하고 해 뜨는 걸 보면서 같이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다.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택시를 잡을 필요도 없다.


원래 낭만은 약간의 자유를 포기해야 배가 되는 법


굳이 연애가 아니더라도 기숙사에는 아슬아슬한 낭만이 참 많았다. 친구랑 야밤 내내 노래방에서 놀다가 통금을 맞추기 위해 헐레벌떡 달려가며 느끼던 밤공기가 아직도 살결에 닿을 듯하다. 정기 점검을 빼먹기 위해 어설프게 도주하다가 학생증으로 딱 들켜버린 일, 야식 먹고 싶을 때 근처 방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작당모의하듯 메뉴를 정하던 일.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뭐든 하는 어른이라지만, 어째서인지 그 시절 살짝은 숨 막히던 규칙이 그리울 때가 있다.


4) 총평

기숙사는 분명 좋은 주거형태다. 가격도 저렴한 편에 속한다. 회사 기숙사라면, 학교와 또 다른 낭만의 맛이 있으리라 본다. 사소한 규칙이 오히려 당신을 그나마 '사람답게' 살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 자취를 하면 무한정 푹 퍼지게 되지만 기숙사에선 그게 안되니까. 알게 모르게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더 잘 씻고, 잘 청소하고, 잘 챙겨 먹게끔 눈총을 줄 룸메이트도 있습니다. 물론 성향이 안 맞으면 괴롭다. 썸탄 사람, 연애하던 사람과 관계가 끝나면 매일이 재회의 장이라 주옥-같다. 소문에는 발이 몇 개나 달렸는지 어젯밤 내가 벤치에서 뭔 얘기했는지 다음날 온 학과생이 다 알고 있다. 그래도 내가 자녀를 낳는다면 한 번쯤은 기숙사에서 살게 해주고 싶다. 여러 에피소드가 많지만 나는 참 즐겁게 살았다.


기숙사! 잘~ 살다 갑니다.


자유도 ★★☆☆☆

재정부담 ★☆☆☆☆ (케바케)

즐거움 ★★★★☆

편안함 ★★☆☆☆

추천: MBTI - 'E' 유형, 인싸 생활하고 싶은 사람, 외로움이 너무 많아 혼자 못 사는 사람, 캠퍼스 낭만 즐기고 싶은 사람

비추천: 고양잇과 사람, 좁은 곳에서 못 사는 사람, 인싸 생활 극혐 하는 사람, 요리하기 좋아하는 사람, 인테리어에 취미 있는 사람 (불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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