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받는 삶에서 "신뢰" 받는 삶으로
요즘 "신뢰"에 관심이 많아졌다. 나이가 들며 인생의 여러 시행착오 속에 얻은 배움도 있고, 또 기업을 경영하며 직원과, 고객과 상대하며 얻은 배움도 있는 것 같다. 사람 관계는 참 많은 부분이 "신뢰"에 좌지우지 된다.
예전의 나는 "기대" 받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많은 이들에게 나의 매력과 잘남을 뽐내고, 이에 홀려(?) 기대를 주고 기회를 줬던 많은 분들 덕분에 참 재밌게 살았었다. 어려울게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열심히 산만큼 얼마나 뛰어난 성취를 이루고 있는지 SNS에 뽐내기만 하면 됐었고, 이에 따라오는 사랑과 관심, 기회에 우쭐하며 또 자랑하고 또 열심히 살며 매력뿜뿜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기대"라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위험한 것인지 이해하고 있다. SendBird의 김동신 대표님은 창업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을 "기대 관리"라고 하기도 했는데, "기대"라는건 증폭제와 같아서 결과가 좋을 때의 기쁨도 배가되지만, 기대와 달리 결과가 좋지 않은 상황에선 (마치 예측 못하고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와 같이) 많은 혼란과 실망, 그리고 빠르게 무너져 가는 조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그저 하기싫은 공부를 하고, 시험을 잘봐 부모님이나 주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만 하면 됐기에 기대를 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일인지 몰랐다. 하지만 스타트업 창업가로서 5년 넘게 살아오며, 내 기대대로 기업이 성장하지 않고, 내 기대대로 팀원이 성장하지 않으며, 팀원들의 기대대로 기업과 대표가 움직이지 않을 때 무너지는 "신뢰"를 보았다. 어떤 팀원은 회사를 떠나며 내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언제 내가 리더의 위치를 달라고 했나요? 스톡옵션 많이 달라고 했어요?
왜 혼자 기대하고 무게 지워서 날 무능하고 비참한 사람으로 만드는거에요?"
그렇다. 함부러 기대를 주는 것도, 함부러 기대를 받는 것도 참 무겁고 위험한 일이다. 나는 기대 받는 삶 대신 "신뢰 받는 삶"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먼저, 사회에서 왜 신뢰가 중요한지 이해해보자. 부끄럽지만 대학교 1학년 때 식권을 제대로 내지 않고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 정신이 덜떨어진 나는 "저기 식권 내는데서 아무도 검사 안 해. 안내고 먹어도 되겠다"라며 식권을 내지않고 먹은 사실을 친구에게 자랑스레 떠벌리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막기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식권을 내는 곳에 식권을 안내면 못들어가게 하는 기계를 설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기계도 몰래 뛰어넘어올지 모르니 쇠창살로 뛰어넘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막아야겠다. 아니 아예 사람을 세워놓자. 근데 이 사람이 친한 사람은 그냥 통과시켜줄지 모르니 두 명을 세워 서로 감시하게 하자...
꼭 이래야 할까?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나 같이 덜떨어진 놈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닫게 해 안하게 만드는 방향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식권을 정직하게 넣고 밥을 먹는건 위반할 방법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식권 하나에 양심을 팔아먹는 정도의 사람이 되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양심의 가치가, 내 인격의 가치가 고작 식권 하나에 팔 정도로 하찮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그걸 몰랐다.
우리가 카페에 잠깐 노트북을 올려놓고 화장실을 다녀올 올 수 있는 것도, 신용카드를 잃어버렸을 때 제자리에서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도, 자율계산대로 무인상점을 운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우리 사회에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잡히면 처벌 받는다'라는 법조항 때문이 아니라 말이다. 사회적 신뢰는 그만큼 세상 사람들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 경제적 효과도 가져다 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회적 편안함을 지키려 서로 집앞에 놓인 남의 배송품을 훔쳐가지 않는 것이다.
개인이 가진 신뢰 역시 마찬가지의 이점을 준다. 신뢰가 있는 연인/부부 관계에선 굳이 상대방이 지금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캐묻지 않아도 되고, 신뢰가 있는 회사/직원 관계에선 굳이 상대방이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캐묻지 않아도 된다. 꼭 당신이 이걸 어겼을 때 받아야 하는 처벌을 세세하게 명문화 하지 않아도, 신뢰가 있는 사람끼리 모이면 그것이 꼭 잡히면 처벌을 받아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정도에 우리 사이의 신뢰를 팔아먹지 않기위해 지킨다. 그만큼 신뢰가 있는 사이는 자유와 안전, 그리고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인생 살며 '불신뢰 하는 사람이 주는 감정적 불편함'만큼 시간/감정 소비가 아까운게 없는데, 신뢰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그런 걱정이 모두 사라진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런 신뢰를 엿 바꿔먹은 적이 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나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면서 깨달았다. '정말 죄송하다...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쌓았던 신뢰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엿 바꿔먹을만큼 하찮은 것이 아니었단 걸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많아질수록 깨닫고 있다. 그리고 신뢰란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관계의 목적일지 모른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작은 신뢰를 던지면 상대방은 거기에 조금 더 신뢰를 붙여 돌려주고, 다시 그러한 핑퐁이 오래 반복되며 둘 사이의 신뢰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기대"가 이렇게 눈덩이처럼 커지면 언젠간 터져야 할 폭탄이 되지만, "신뢰"가 이렇게 눈덩이처럼 커지면 우리에겐 무한한 자유와 안전, 편안함과 기쁨을 주는 안락한 터전이 되어준다. 이렇게 오랜 시간 쌓인 신뢰를 한순간에 배신하는 일은 그만큼의 인생을 엿 바꿔먹는 짓이며, 당신의 인생 목표가 폰지사기꾼처럼 신뢰를 엿바꿔 먹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꼭 큰 행동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믿는데 딴짓을 열심히 하는 행위, 고객은 열심히 우릴 위해 힘쓰고 있다고 믿는데 하는 척만 하고 다른 신규고객만 찾아다니는 행위, 연인/가족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재미난 일 없나 찾아다니는 행위 등, 우리가 믿는 얕은 수의 '최적화'나 '멀티태스킹' 같은 일들이 모두 이에 해당 된다. 내가 직접 해보고 후회하며 드리는 말씀이다. 그러지 마시라. 그저 진정성 있게 최선을 다하시라. 책 "왜 일하는가"의 이나모리 가즈오 선생의 발톱의 때도 못쫓아 가겠지만, 남은 인생 어디 한번 그런 삶을 추구해 보자.
더이상 매력뿜뿜 넘치는 '보기좋은 떡' 같은 삶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
기대 받는 삶 말고, 신뢰 받는 삶을 살겠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