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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un 03. 2019

고갱, 황금색의 희망과 절망

고갱, 황금색의 희망과 절망

1.    노란색의 재탄생


그것은 개나리의 색이자 수선화의 색이었고, 민들레와 유채꽃의 색이었다. 태양의 색이자 황제의 색이었고, 땅의 색이자 강의 색(황하)이기도 했으며, 황금의 색이자 인간의 색(황인종)이었다. 클림트의 <키스>로 대변되는 에로틱한 색이었고, 고흐의 <해바라기>로 대표되는 불타는 색이었다. 봄, 밝음, 생명력과 같은 빛나고 싱그러운 것들의 색이었다. 봄이 오면 입고 싶은 옷의 색이었고 프리지아 한 다발의 색이었다. 라이온킹의 색이자 햇병아리의 색이었다. 그런 색이었다, 노란 색은. 밝고 환하며 앳되고 여린 색.


그러나 김연아가 ‘어릿광대를 보여주오’에 맞춰 노란색의 의상을 입고 빙판위에 섰을 때, 노란색이 애처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나부낄 때, 노란색이 비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고갱의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노란색이 얼마나 많은 색을 품을 수 있는지를 알았다. 신비롭고 숭고한, 먹먹하고 위대한, 장엄하고 초췌한, 그 모든 빛을 담고 있었다.


고갱의 삶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다채롭다. 어린 시절 신문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페루의 수도 리마로 이주하던 중 아버지를 여읜 고갱은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청년기에는 증권중개인으로 일했다. 증권중개인과 화가의 간극은 숫자와 색채의 간극만큼이나 동떨어지게 보인다. 인생의 대전환, 개인적인 두려움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그림에 대한 애정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들은 글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하고, 외과의사들은 수술을 해야만 존재의미를 느낀다고 하며, 운동선수는 하루라도 연습을 거르면 오히려 몸이 불편하다고 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들이리라. 그렇다면 고갱은 금융인에서 화가가 된 것이 아니라 화가가 되기 이전에 잠시 금융업에 몸담았던 것이리라.


시대의 우울과 사회적 위기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느 쪽이든, 이들은 필연적으로 예술을 부흥시킨다. 르네상스나 태평성대와 같은 황금기에만 예술이 융성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결핍과 허기, 혼란과 불안을 먹이삼아 자라기도 한다. 당시 유럽을 강타한 경제 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가난과 고통으로 몰아 넣었을지 모르지만, 고갱과 같은 위대한 화가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가 평생 증권중개인으로 살다가 삶을 마감했더라면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혹은 타히티의 생생한 힘이 오롯이 담긴 이와 같은 그림들은 탄생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2.    행복한 증권중개인, 불행한 화가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 어두운 숲에 처해 있었네…” 단테의 <신곡>은 이와 같이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단테는 서른 다섯의 나이에 이 불후의 역작을 남겼는데, 당시는 사람의 평균 수명을 70세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그 중간 지점인 35세를 인생의 절반을 지난 시점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평균 수명이 훨씬 길어진 지금도 35세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마련인데, 고갱은 27세 무렵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35세가 되어서야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프랑스의 경제 위기로 증권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대거 실직하는 상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IMF위기로 직장을 잃은 가장이 일용직이라도 하여 가족을 부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가로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하다니. 가족들은 반대했고 화가인 친구들은 만류했다. 그러나 강한 자기확신과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생의 2막을 연다.


고갱은 증권중개인으로 일하던 시절, 비교적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짧은 기간 안에 일을 터득하여 젊은 나이에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취미로 배우던 그림을 직업으로 전환하게 된 데에는 그림에 대한 애정, 유럽의 경제불황 뿐 아니라 성공에 대한 맹신도 있었을 것이다. 한 번 성공을 경험한 자는 성공이 먼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의 용기와 자신감과는 달리, 화가로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이미 자녀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길로 들어선 가장을 보는 아내의 마음은 말못할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다. 초반 반짝 인정을 받는 듯했으나 예술가의 길은 녹록치 않았다. 경제적인 여건은 이내 궁핍해졌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떠았다.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가장을 떠나야 했던 아내를 비난할 수도 없다. 현실은 늘 준엄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기에. 화가로서 성공하면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고갱에게 펼쳐진 현실은 그의 기대와는 늘 다르게 흘러갔다.




3.    타히티, 낙원이었을까 도피처였을까 


1880년대, 인상주의 미술의 시기였다. 일상의 소재에서 찰나의 빛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화풍 대신 고갱은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다른 예술가들과는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소재, 자신만의 화풍, 자신만의 색채. 고갱에게는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문명보다는 자연에서 그 힘을 찾던 고갱은 그 무렵 고흐와 작업을 함께하며 우정을 쌓는다. 그러나 역사에 잘 알려진 대로 이들의 우정은 단 2개월 여 만에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성격이 급하고 즉흥적인 것으로 알려졌던 고갱은 고흐의 귀를 베어낸 범인으로 지목받지만 과묵한 고흐가 입을 연 적이 없어 여전히 확인된 바는 없다. 미술사의 미제이자 역사의 미제는, 피해자의 침묵으로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이 무렵 그린 <황색의 그리스도>(1889)에는 고갱의 노란색이 드러난다. 아직은 희망의 노랑. 브르타뉴의 온화한 빛이 깃든 노랑. 이내 방황하는 영혼 고갱은 새로운 세상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타히티였다. 스스로도 자숙의 기간이 필요했다고 여긴 것인지, 단지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원시의 자연과 낯선 문명이 그의 그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상처와 좌절로 가득 찬 프랑스의 평단을 떠나 자신만의 재활을 위한 분리된 세계가 필요했던 심리적 이유와, 프랑스에서의 삶을 계속하기에는 힘에 부쳐가는 경제적 이유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황색의 그리스도, 1889, 캔버스에 유화, 울브라이트녹스 미술관(미국)


타히티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을 선보이며 재기를 꾀했지만 쉽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그림을 그리며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타히티는 그에게 낙원이었을까 연옥이었을까. 휴양지였을까 은둔지였을까. 치유의 땅이었을까 패배의 땅이었을까. 고향이었을까 유배지였을까.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은 그의 사후에는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으나 생전에는 영예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타히티에서도 그의 삶은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꽃피었던 적 없기에 타히티에 대한 그의 열망이 종래에는 어떤 감정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멀고 먼 이국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던 화가의 마음은 화가의 그림으로 유추해 보는 수밖에. 아름다운 색채가 돋보이는 고갱의 타히티 시절 작품 <이아 오라나 마리아(아베마리아)>는 낙원으로서의 타히티를 짐작하게 한다. 타히티가 그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지만 그만의 소재와 색감, 화풍을 완성할 수 있도록 영혼의 대지이자 모성의 땅이었음을 그림은 알려준다.


이아 오라마 마리아(아베마리아), 1891, 캔버스에 유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미국)


그러나 화가는, 고갱은, 끝내 생의 후반에서도 행복을 거머쥐지 못한다. 아니, 결정적인 시련이 그의 삶을 강타한다. 아마 그에게서 그나마 남아 있던 생의 희망과 의지를 밑바닥부터 흔들어버린 사건. 사랑하던 딸 알린이 20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 것이다. 이미 고갱 자신의 건강도 악화되어 있을 무렵이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병약한 상태의 그는 이 소식의 충격으로 휘청이다 못해 주저앉는다. 딸의 뒤를 따르고자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만다. 삶이 징벌처럼 느껴졌을 그 시기의 감정은 고갱이 그의 친구였던 작곡가 몰라르에게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친애하는 몰라르,


운명은 늘 내게 적대적이었네. 그래서 이런 글을 쓴 적도 있었네.

‘신이여, 당신이 정녕 존재한다면 전 당신의 부당함과 심술궂음을 고발할 것입니다.’

그렇네.

불쌍한 알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누구도 신뢰할 수 없게 되었어.


이를 악물면서 코웃음쳤지.

덕성, 노동, 용기, 지혜가 다 무슨 소용이겠나. …”




그리고 그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서, 그림을 넘어 철학이 된 이 그림을 완성시킨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림의 원제는 그림 제목으로는 다소 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o Vennons Nous? Que Sommes Nous? O Allons Nous?)> 이다. 제목처럼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함축된 한 편의 대서사시와도 같은 이 장대한 작품은 한 작품 안에 3부작의 형태로 펼쳐진다. 오른쪽부터 세 가지의 질문을 그림으로 펼쳐내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는 어린아이와 세 명의 여인을 통한 생명 탄생의 과정을 나타낸다. 생의 근원을 여인에게서 찾은 그의 사상은 <아베마리아>에서 이어져 온 것처럼 보인다. 중앙의 ‘우리는 누구인가’는 경험의 열매를 따는 젊은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나타내고자 했다. 이 젊은이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같기도 하고, 선악과를 따는 아담같기도 하다.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인간의 삶은 무지에서 지식과 지혜에 이르는 여정이나, 때로는 그 깨달음의 끝에 고통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잃은 고갱에게는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왼편의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죽음을 기다리는 여인이 흙빛으로 그려져 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가장 오른쪽과 가장 왼쪽의 여인들을 통해 그려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원제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 1897, 캔버스에 유화, 보스턴 미술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4.    노란, 빛의 완성


행복한 사람은 신을 찾지 않는다. 찾을 이유가 없다. 그들은 현세에 충실하며 지금을 즐기면 된다. 보이지 않는 신보다 보이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이 진정 신을 찾는 순간은 고통과 절망에 빠졌을 때이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가. 신은 어째서 나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는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사람은 운명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고 신의 존재를 찾게 된다.

때로 위인들의 삶은 지나치게 불행해서 얄궂게 느껴 지기도 한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거나, 비참한 말년을 보냈거나, 경제적인 고난에 허덕였거나,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거나, 시기와 질투에 시달렸거나,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거나. 그러나 때로는 그들의 고통이 거대한 섭리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러한 고통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역작이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고통은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때로 어떤 고통은 가혹하리만치 무정하다.


그들에게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을 와인처럼 발효시키고, 어떤 사람은 식초처럼, 또 어떤 사람은 된장처럼 발효시킬 것이다. 그러나 끝내 숙성에 이르지 못하고 부패되는 삶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시간의 검증을 거쳐 밝혀지게 될 진실들. 어떤 시간을 보낼 것이며 어떻게 삶을 숙성시킬 것이며 어떤 결과로 만들어 낼 것인가. 때로 고통은 삶을 명작으로 숙성시키기 위한 과정이라는 진리를 겸허히 깨우치게 된다.


왜 우리는 고통을 겪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기도 하다. 고갱은 그토록 곡절 많은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고, 사랑하는 자녀를 잃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생은 피한다고 피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버둥치고 도망가려 해도 발목에서 풀 수 없는 족쇄같은 짐이, 어깨에서 내릴 수 없는 지게같은 짐이 누구나 인생에서 하나쯤은, 아니 그 이상은 있지 않은가. 한가로이 넋놓고 앉아 목놓아 울기만 할 수도 없을 만큼 우리는 다시 삶의 전선에 내몰린다.


화가는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필경 신을 원망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신의 무정함에 분노하고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지 반문했을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지, 신이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의 삶과 인간의 삶을 한데 모아 되짚어 보았을 것이다. 신도, 삶도 이해하기 위해. 삶에 대한 비애와 열망과 인내와 회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않았을 작지만 강한 희망이 이 노란빛에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이 노랑은 봄과 아침의 노란빛이 아닌 겨울과 저녁나절의 노란빛이다. 굽이치는 인생의 등락을 넘어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는 나지막한 노란빛. 슬픔을 넘어 숭고한 노란빛이자 절망을 넘어 숙성된 노란빛. 고흐의 해바라기같은 타오르는 노란빛도, 클림트의 여인들 같은 절정의 노란빛도 아닌,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거친 뒤에 오는 깨달음과 인고의 노란빛. 이토록 절절하고 이토록 잠잠한 노란빛. 이 차분한 노란색은 그렇게 삶을 성찰하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반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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