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렉처 ARTLECTURE Aug 21. 2019

그릴 수 없는 것 그리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예술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展

https://artlecture.com/article/910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예술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그의 대표작 160여 점이 걸려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동선은 총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으로 된 연대기 순이다. (최근작-후기 묘법 시기-중기 묘법 시기-초기 묘법 시기-유전질 시기-원형질 시기) 박서보의 작품 중에서 다양하면서 깊이감 있는 색채를 띤 후기 묘법 시기 작품을 자연 채광에서 감상하도록 하는 이유라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1층에서 시작해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과연 그의 색채는 산뜻하며 깊었고, 가벼우면서도 아득했다.


그의 그림은 입체 같은 평면이어서, 캔버스마다 나있는 고랑은 지난한 삶의 경로를 따온 것 같았다. 한편, 그 고랑은 일종의 벽이기도 했다. 벽은 캔버스 곳곳에 세워져 있어서, 서로 다른 두 색이 명징하게 구분되기도 하며, 어느 순간 벽을 무너뜨려서 두 색이 서로 왕래하기 편하도록 길을 터주기도 한다. 조화와 분리, 연합과 독립, 전체와 객체가 각각 명료하다. 그래서일까. 큰 사이즈의 캔버스도 압도적이기보다 다소 소담한 느낌이다. 또한 전체는 폭력적이지 않게 아늑하다. 


박서보의 작품 흐름은 그의 단색화처럼이나 선명하게 구분된다. 1961년 세계 청년 화가 파리 대회 합동전(유네스코 국제조형미술 연맹 프랑스위원회 주최)에 참가하기 위해 건너간 파리에서, 그는 11개월간 체류했다. 앵포르멜 미술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고국에서 벌어졌던 비극, 총포탄이 쏟아지는 거대한 참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의 절규 혹은 절망 등을 검은색으로 덧칠한 캔버스를 ‘찢어발기며’ 표현했다. 이것이 그의 첫 개인전이다. <박서보 원형질 전>.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이후 그는 ‘원형질’의 시기를 마감하고, ‘유전질’ 시기를 열어젖힌다. 엥포르맬의 시효가 끝났다고 판단한 그는, 검은색이 아닌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부재했던 형태를 만들고, 오방색을 이용하여 화려한 원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인체의 형태를 그렸는데, 정작 인체의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그러니까, 옷만 걸친 형태,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인체인 셈이다.



사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건, 따로 있었다. ‘묘법’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다. 박서보는 유전질 시기를 마무리하고, 묘법에 이르러 색으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나려고 한다. 인터뷰에서 했던 그의 말을 인용해서 표현한다면, ‘묘법’ 시기는 ‘탈이미지, 탈논리, 탈표현’하는 시기다. 그의 작품에 대해 이우환은 이렇게 썼다. 


“캔버스를 북처럼 팽팽히 맨 다음 연한 그레이(혹은 크림) 계통의 중간색으로 바닥을 다지는가 하면, 그것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연필로 호흡에나 맞춘 듯이 일정한 방향과 간격을 두고 필세의 강약의 반복으로 전 화면을 일일이 긁어놓고, 그리고는 또 그 위에 열심히 그레이로 덮어버리더니 다시 연필로 긁어내고, 또 덮어 씌우고 긁어내고, 덮고 긁고…. 그러기에 근본적으로는 어느 작품이고 밑도 끝도 없고 완성도 미완성도 없이 어떤 것은 연필의 강한 필세에서, 또 어떤 것은 그레이로 뒤덮인 상태에서 멈추어 있으면서도 마냥 끝없는 반복의 표정을 짓고 있기 마련이다. …… 애초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이 끝없는 자기 수련의 세계이고 보면, …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짓을 구태여 하는 것, 표현욕의 단념과 극기를 위해 수양을 쌓고 도를 닦는 일에 가까운 프로세스가 되지 않을 수 없나 보다. 주문을 외우듯 참선을 행하듯, 필경 박서보 씨는 되도록 단조로운 행위의 반복을 통한 수련과정에서 스스로를 참고 억제시켜감으로써, 끝내는 거기에 환히 열리는 드맑고 크낙한 해방의 경이를 노닐고자 함일러라.”


이우환, <박서보, 또는 단념의 양식에 관하여>, 1974.


단조로운 행위의 반복, 표현욕의 단념, 수양을 쌓고 도를 닦는 일. 박서보는 이 일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표현했다. “포기와 체념의 미학”. 그러니까,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수양을 하는 것이다. 캔버스에 그은 선은 참선과 같아서, 일정한 힘과 간격, 길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하는, 그림의 도를 닦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합일’을 이루고 싶었다고 한다. 선을 반복해서 긋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행위의 호흡만이 남는 상태, 무위자연의 상태에 이를 때 진정으로 작품과 화가가 하나가 되는 합일. 그래서 선을 그으면서 그는 늘 채우려 하지 않고 비우기 위해 애썼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거나 표현하는 게 아니라, 어느 것도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린다는 것. 그리지 않을 때, 비로소 그릴 수 있는 그림. 그것은 자신, 자아, 나를 없애며 작품과 완전히 합일을 이루는 신비로우면서, 지극히 담담한 그 상태여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박서보, 그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올해 88세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행 중이다.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리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안타깝게도 평범한 나로선, 그 상태가 어떤 것인지 감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박서보가 도달하고자 했던 그것과 비슷한 상태에 대해, 어떤 예술가가 했던 말을 알고 있다. 아마도, 그 역시 그런 상태에 도달하고자 했으리라. 시인 심보선이다. 그는 시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시는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시인이라는 정체성과 시인의 이력이라는 삶의 연속성을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매번 시를 쓰고 “내가 이것을 어떻게 썼지?”라는 경이와 두려움에 빠진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민음사, 2005)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래, 그는 써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종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쓰는 나’는 쓸 수 없는 것을 씀으로써 ‘인격적인 나’를 소멸시킨다. 시를 쓰는 행위는 둘로 나뉜 나를 드러낸다. 분열이라기보다는 균열의 방식으로 그렇게 나뉜 나를 보여준다. 첫 번째 ‘나’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현생으로 기억한다. 연속적이고 동일한, 그러므로 예측 가능한 자아의 이력으로서의 현생 말이다. 두 번째 ‘나’는 자신의 모든 과거를 전생으로 기억한다. 쓸 수 없는 것을 씀으로써, 나는 계속해서 나 아닌 존재로 거듭난다. 따라서 과거는 수많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타자들로 가득한 전생이 되는 것이다.”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문학동네, 2019.


어떤 예술가는 작품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는 합일의 방식으로, 또 어떤 예술가는 ‘나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고, 쓸 수 없는 것을 쓰게 된다. 아마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 이 구절은 간증이지 않을까. 타인을 연기하거나, 타인을 창조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타인의 눈으로 시를 쓰거나, 타인의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나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하여 지칠 줄 모르도록 수행하는 것. 이것은 그림이다. 이것은 ‘입체 같은 평면’이다. 이것은 시다. 이것은 균열하는 나다. 이것은 자신이면서 타자다. 이것은 예술이다. 


참고자료

1. 이우환, <박서보, 또는 단념의 양식에 관하여>, 1974.

2.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문학동네, 2019.


전시정보

전시 :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09.01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글_아트렉처 에디터_이정식


Artlecture.com

Create Art Project/Study & Discover New!

https://artlecture.com

매거진의 이전글 전시 공간의 시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