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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Aug 25. 2019

사죄를 받기 위한 김복동 할머니의 27년 여정

영화 [김복동] 리뷰

https://artlecture.com/article/979


일본 사죄를 받기 위한 김복동 할머니의 27년 여정

영화 [김복동] 리뷰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 거야”



영화 [김복동]은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 사죄를 받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함에 한숨이 나온다. 그럼에도 목소리를 내는 김복동 할머니에 울음이 나오고, 동시에 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 당연한 얘기지만 잊지 않고 목소리 내는 것. 김복동 할머니는 92년 3월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발했다. 그 이후 여성 인권을 위해 '나비기금'을 발족하는 등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시다 19년 1월 28일에 별세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싸우셨지만,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게 속상하다. '속상하다'는 표현 그 이상을 찾고 싶지만, 이 답답함과 억울함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김복동 할머니 목소리에 이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기억해낼 때마다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어야 한다. 그래도 김복동 할머니는 끝까지 목소리를 냈다. 잊을 수 없는 그 생생한 기억을 꺼내어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다니면서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이는 구십 세, 이름은 김복동"이라고 하실 때마다 이름에서 강인함이 느껴졌다. 역사의 잘못됨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증거가 없다며 일본 정부가 피해사실을 무시할 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증인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되물었다. 뒤로 숨어버리는 일본 정부를 보면서 난 "이게 말이 돼?"라고 화면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91년 고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하기 전까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과거의 기억을 억누르면서 살아갔다. 말하지 않는 게 가족에게 피해 가지 않는 일이라 생각하셨다. 하지만 억지로 잊으려 했던 그 기억들은 수십 년이 흘러도 잊을 수 없을 만큼 큰 상처였고, 분노였다. 92년 김복동 할머니가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위안부 피해사실을 공개 증언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이후 김복동 할머니는 1000회가 넘는 수요시위에 참여하셨다. 추운 겨울과 무더운 더위에도 시위에 참여하셨지만, 힘든 내색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자리를 함께 해준 사람들에게 힘을 얻고 힘을 주시지 않았나 싶다.


김복동 할머니는 어린 학생과 청년들에게 유독 손을 내미셨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다치지 말라는 따뜻한 말을 하실 때마다 울컥했다.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목소리를 모은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많은 시위가 일어나고, 그 뜻을 전하기 위해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설치됐다. 사람들의 후원으로 만들어낸 소녀상이다. 일본대사관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에 절대 그 날을 잊을 수 없다는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문득 겨울에 소녀상에게 목도리와 담요를 덮어주던 사연이 떠올라서 울컥했다.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위안부 피해를 알린 덕에 미국에도 소녀상을 설치할 수 있었다. 수요집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하자 일본에서 협의를 요청했다. 2015 한일 합의로 위안부 문제 종결을 선언했고, 한국에서 화해 치유 재단이 만들어졌으며 10억 엔을 받았다. 일방적으로 맺은 굴욕적 합의다. 진정성 있는 사과조차 없었다.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줬다. 피해자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이 사과를 받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다시 봐도 너무 황당하다. 돈이 아닌 사죄를 바랐는데, 돈으로 해결하려는 것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 어떠한 의논도 없이 협의를 받아들였던 게 어이가 없다. 화해 치유 재단은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10억 엔은 일본에게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마지막 크레딧에 윤미래의 [꽃] 음악이 흘러 나온다. 김복동 할머니의 27년간 투쟁을 본 후 윤미래의 꽃의 가사를 들으니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포기하라고 해도 끝까지 싸우셨던 김복동 할머니가 생각났고, 끝내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한 그 답답함 때문이다. 이제 국내 위안부 피해 생존자 할머니는 단 20명이다. 삶 자체가 증거인 할머니가 다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잘못된 역사교과서를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기약 없는 긴 싸움이 될 수 있지만, 할머니 외침에 이어 끝까지 싸워야 한다.



빈 들에 마른풀 같다고 해도
꽃으로 다시 피어날 거예요.
누군가 꽃이 진다고 말해도
난 다시 씨앗이 될 테니까요.

그땐 행복할래요.
고난했던 나라들
이젠 잠시 쉬어요.
또다시 내게 봄은 올 테니까




글_아트렉처 에디터_송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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