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차 방호시설의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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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갑작스럽게 전쟁이 발생하면 과연 어떨까? 한 없이 평화로워만 보이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공포와 혼란만이 가득한 상황일 거다. 우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질문에 답해 보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생사에 기로에 선 채 끊임없이 방황하다, 어쩔 줄 몰라 끝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전쟁 가능성에 늘 노출되어 있는 우리지만 나를 포함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에겐 여전히 전쟁이 낯설고 실체 없는 두려움 같다. 그저 짐작으로만 가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과거에 전쟁을 경험했던 그 시절의 아이들도 전쟁은 처음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전쟁을 체감할 수 없다면, 잠시 과거로 돌아가 그때를 만나보는 것도 방법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군은 38도선과 동해안 연선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 수적으로 밀리는 상태에다 장비도 부족했던 대한민국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오전 9시, 개성 방어선이 격파되고, 동두천과 포천이 함락되었다. 26일엔 의정부, 27일엔 서울 도봉구 창동 방어선을 넘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리자 곧바로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가 점령되고, 오전 2시 30분에 폭파를 맡은 장교 세 사람에 의해 한강 대교가 폭파되었다. 북한군은 남침 후 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후에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와 사건들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사망했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3년 간 지속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한국 휴전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휴전협정을 맺는 자리에 한국군은 참석하지 못했다. 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한 상태였고,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탱크로 남침했던 서울의 진입로는 도봉구였다. 이후 또다시 발발할지도 모를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해 1969년 도봉구 도봉동 6-5 일대에 5개 동의 대전차 방호시설을 설치하게 된다. 1970년에는 노출 방지를 위해 구조물 위에 아파트가 증축되었다. 육군본부 원호 관리국이 군사상의 목적으로 그린벨트 지역 내의 땅을 수용해 지은 도봉구 최초 시민아파트로, 초기에는 주로 하사관급 이상의 군인들이 거주하는 사택으로 이용되다가 1972년에 서울시가 이 시설을 인수하면서 대부분의 입주민이 일반주민으로 바뀌었다. 2004년에는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아파트가 철거되었고, 군사시설이었던 대전차 방호시설은 철거되지 않은 채로 10년 넘게 방치되어 있었다. 근데 왜 아파트만 철거했을까? 건물의 노후화 정도는 비슷했을 테고 방치될 정도였으면 군사시설로서의 의미는 없어졌다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땐 방치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대전차 방호시설은 10년 동안 흉물로 방치되었다. 군사시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언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을까? 2013년 6월 도시재생 특별법이 재정되면서 도시재생 시대가 열렸다. 박원순 시장이 ‘현장 시장실’로 도봉구를 방문했을 때 이동진 구청장은 대전차 방호시설을 리모델링하여 주민의 품으로 돌려주자는 의미에서 사업을 제안하였다. 이후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진될 것처럼 보였으나 여러 가지 행정적 절차상의 어려움으로 진행되지 못하다가 2014년 7월 도봉구청과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간담회가 이루어지면서 시민추진단이 결성되었다. 대전차 방호시설은 토지, 건물 등이 다자간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어 관할 자치구인 도봉구에서 자체적으로 예산을 마련하고 행정적인 절차와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때문에 시민추진단이 서울시에서 개최한 시민정책박람회를 통해 예산을 확보하였고, 건축설계공모를 진행했다. 군사시설인 만큼 군부대와의 협의도 필수적이었는데, 1년이라는 협의 기간을 거친 결과 2016년 12월 서울시, 국방부, 도봉구가 함께 '군사시설 공동 활용 업무협약'을 맺으면서 마침내 평화문 화진지로서 시작을 알렸다. 2017년 10월 공사가 마무리되고, 31일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평화문 화진지의 과거 시민아파트였던 모습을 사진으로 밖에 접할 수 없는 상황이 좀 아쉽긴 하지만 군사시설을 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용도를 변경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는 면에서 굉장히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시민아파트였던 시절 사용하던 계단의 흔적이 남아 있고, 군사시설로서의 공간 배치는 경험해본 적 없기에 방문하기 전부터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맑고 화창한 날 저 멀리 높게 솟은 도봉산이 보였다. 그 아래로 시선을 낮추면 도봉산역으로 향하는 7호선 전철이 지나간다. 전철이지만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칙칙-폭폭-’처럼 들리는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듣는 건 처음이지 싶다. 시선을 가로막는 방해물 없이 가슴이 뻥 뚫리듯 저 멀리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한 평화문화 진지. 북한군이 이곳을 통해 남침했다는 사실이 잘 와 닿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잘 살펴보면 군사지역이었음을 알리는 표식이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평화문화 진지는 1층 높이로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그래서 주변의 풍경이 눈에 잘 들어온다. 건물의 끝자락에는 전망대가 있다. 시민동, 창작동, 문화동, 평화동, 예술동까지 총 다섯 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의 형태를 가지고 있되 전면에 새로운 공간을 신설하여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는 공간이 되었다. 시민아파트 당시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건물 전면 앞쪽으로 가면 소총을 저격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창문을 볼 수 있다. 길게 뻗은 길은 문과 문 사이를 통과하면 한 번에 갈 수 있다. 문과 문 사이 빈 공간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긴 했는데 햇빛을 가리는 천장이 없이 뚫려 있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유용할 것 같진 않았다.
앞쪽은 넓은 잔디로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고, 군데군데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펴두고 휴식을 취하는 가족, 연인들을 볼 수 있다. 또 여름이라 그런지 수영장도 설치가 되어 있고, 풋살 경기장, 체육관도 있어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솟아 오른 전망대는 건물 옥상으로도 연결이 되고, 지상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도 있다. 앞쪽에는 이곳이 군사시설이었음을 알리는 전차가 서 있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독일에서 무상기증을 받은 베를린 장벽이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제주 4·3 평화공원에 설치된 것을 보고 직접 아이디어를 낸 것이라고 한다. 분단과 평화의 상징으로 굉장히 의미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어떠한 시선으로, 의미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가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르고 지나가는 건 대전차 방호시설에서 공유공간으로 리모델링한 의의가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드니깐 말이다. 도심 번화가에서 지하철을 타도 거리가 꽤 되는 이곳을 찾는 이들의 유형을 조금 생각해 보자면, 도봉산을 올랐다가 잠시 들른 등산객, 인근 거주자(동네 사람들, 주민), 공간이 궁금해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사람으로 요약해 볼 수 있을 테다.
평화문화 진 지를 둘러보는 동안 지나가는 몇몇 분들의 호기심을 제외하곤 크게 진지하게 이 공간에 대해서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내부 공간에서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잠깐 들어왔다가 끝까지 보지 않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도 낮을까 싶었다. 부모보다 아이가 궁금해해서 들어오긴 했는데 설명을 해주기보다는 한번 쓱 훑고 나가기 바쁜 발걸음에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적지근함이 남았다.
평화문화 진 지가 끝나는 지점에는 인도와 맞닿은 계단이 있다. 원래 있던 건 아니고 대전차 방호시설이 지나는 구간에 노원구 월계동 월릉교 사거리에서 도봉구 도봉동 서울 창포원 앞을 잇는 도로인 마들로가 생기면서 건물의 3/1이 철거가 되었고, 그 단면에 계단을 만든 것이다. 계단을 내려와 살짝 앞으로 틀면 텃밭이 펼쳐지고 건물을 바라보면 좀 더 실감 나는 대전차 방호시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부에서 보는 것과 다른 온도차를 느낄 수 있다.
전망대로 올라가면 길게 뻗은 평화문화진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주변 지역 형세를 조금이나마 좀 더 잘 알 수 있다. 서쪽으로는 도봉산, 동쪽으로는 수락산과 중랑천, 신설도로인 마들로와 그 너머 의정부. 뒤쪽으로는 아파트 단지가 펼쳐진다.
공간을 꼼꼼히 둘러보고 잔디밭 한편에 쭈그려 앉아 사람들을 관찰했다. 이곳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원래 의도했던 계획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이곳을 혹은 이 공간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높은 산이 근처에 있고, 공기가 깨끗하고, 번잡스럽게 북적 거리지도 않고, 잔디밭과 식물, 공원이 있고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곳?
글_아트렉처 에디터_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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