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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Oct 04. 2019

세상을 사랑하려는 안간힘에 대하여  “나의 삶과 문학”

영화 <벌새> 를 중심으로

https://artlecture.com/article/1066


1.


오래전 강남의 교보문고를 갔을 때 일이다. 평소처럼 수십 권이 진열된 매대 앞을 지나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쓴 한 권의 책은 실은 그 사람의 일기가 아닐까. 자전적인 산문이든, 허구의 소설이든, 심지어는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학술서나 자기 계발서라 할지라도, 그 하나의 책을 완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한 흔적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시간을 지웠던 수많은 세월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거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몇 개월에서부터 수십 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의 최소 단위인 하루가 끝내 완성한 책들. 그러니 책에는 그 사람의 숱한 하루가 깊게 배어있을 것이다.


그러자 벽면을 가득가득 메운 수백, 수천 권의 풍경이 일제히 근사해졌다. 그러니까 여기에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있구나. 저마다 할 말들을 가득 안고 숨죽이고 있구나. 그 삶들이 지금 내게로 건너왔고 건너오고 있구나. 그 사실이 이상하리만큼 신기했다. 삶이 삶으로 건너가고, 건너온다는 것이. 누군가의 시간이 누군가의 시간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 어느 하류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검푸른 밤하늘로 짙은 어둠이 스며드는 것처럼.



2


  “유리야, 너 내가 좋다고 했잖아. 네가 먼저 나 좋다고 한 거잖아.”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


영화 <벌새>에서 유리(설혜인)의 대답에 은희(박지후)는 아연했다. 은희의 입에서 말 대신 침묵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옅어지고 마는 걸까. 바람에 눈물이 마르는 것처럼, 속에서 가득 고였던 애틋함도 어느새 말라버리는 게 당연한 것일까. ‘그건 하나도 당연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내가 어쩌면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은희는 침묵 안에 이런 말들을 꽁꽁 숨겨놓았을지도 모른다. “지난 학기잖아요.”라는 말속에 유리가 지독한 담담함을 숨겨놓은 것처럼.



3


영화 <벌새>가 좋은 이유를 나는 두 번째 다시 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의문하고 답했던 것을, 이번에는 영화가 내게 질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니, 라는 질문에 나는 잘 모르겠어, 라는 회피에 가까운 대답을 했다. ‘그렇다’는 것도, ‘그럴 수 없다’라는 것도 거짓말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기에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곧바로 떠올랐고,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하나 손꼽아도, 세상을 마땅히 사랑할 이유에 의해 그 생각이 탄핵되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그 어느 것도 아직 대답할 수 없다. 잘 모른다는 게 차라리 솔직한 대답이다.




솔직한 김에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커녕, 나는 이해하는 것조차 버겁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 가능해야 했는데, 나는 도무지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2014년 4월, 바다에 가라앉아야 할 사람이 왜 그들이어야 했는가. 1994년 10월, 추락해야 할 사람은 왜 그들이 되어야만 했는가. 소수의 안위를 위해서 왜 누군가의 생명이 스러져야 하는 것이며, 수십 년을 함께 늙어온 집에서 내몰려야 하는 것은 왜 그들이어야 하는지. 그저 집을 지키려고 했을 뿐인데, 경찰의 무리한 진압을 막으려다가 정작 왜 자신의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것인지. 세상에는 왜 이런 일들이 도처마다 일어나는지,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나는 사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마치 춤추며 리듬 타는 것 같은 어린아이의 걸음걸이, 강아지풀 같은 갓난아기의 웃음소리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내겐 없다. 무더운 여름날에 먹는 복숭아, 한 모금 베어 물면 입안 가득 고이는 단물, 이런 것들도 세상이 내게 준 것들이니까… 라는 생각이 들면, 나는 세상을 미워하기를 그친다. 하지만 난해한 것은 마찬가지다. 내게 복숭아의 단물을 주는 세상이, 차마 삼킬 수 없는 거대한 슬픔까지 내게 건넨다는 것이. 둘 사이의 잔인하리만큼 서늘한 낙차에서, 나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만다. 다만, <벌새>는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부터 바라보자고. 차근차근 거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고. 급할 거 없으니. 나직한 목소리로 영화는 내게 말을 건넨다.



4


은희는 자주 사람들을 사랑했지만, 사람들은 그보다 더 자주 은희를 떠났다. 은희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없이, 그들은 늘 제멋대로 떠났다.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됐고, 유리는 다 지난 일이라고. 지금은 다르다고 일축하며, 영지 선생님은 갑작스럽게 학원을 그만두게 되는,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썰물처럼, 자신에게서 빠르게 멀어져 가는 사랑을 은희는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이 모든 진행과정에서 은희는 한없이 무력하다.


다만 은희는 반응할 뿐이다. 아이는 마음을 나눴다가 빠져나간 세명의 사람에게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유리에겐 원망하고, 남자친구에게는 애초에 사랑한 적 없었다고 자기감정을 부정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깊게 나눈 영지 선생님에게는 말없이 눈물만 흘린다. 어떤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그런 것처럼.


은희의 사랑 이야기가 ‘삶-나’의 관계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하면, 이 이야기가 어쩐지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종종 세상에 대해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은희의 감정과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남자친구같고, 유리 같으며, 영지 선생님 같다. 이제 더 깊어지려는데, 남자친구는 은희를 떠나 다른 여자아이와 사랑을 나누고,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어떤 감정은 마땅히 지워져야 한다고 유리는 말하며, 애써보려 해도 말도 없이 갑자기 학원을 그만둔 영지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때로 거대한 슬픔이, 고통이 예고 없이 그들을 덮칠 때와 마찬가지로. 그때마다 은희는, 아연하거나 멍해져서 말을 잃거나,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글을 쓰거나 읽기 싫어진 적이 있었다. 영화를 오래 보거나 같은 음악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을 때처럼, 글이 물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는데, 이 모든 일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글을 읽는 동안에는 행복했었는데, 책장을 덮어버리고 나면 기억의 저편에서 서서히 활자들이 내게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번은 그 사실이 조급하게 느껴져서 더 많은 글을 읽었는데, 오히려 더 많은 기억들이 흐려지기만 했다. 메모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걸 내 몸에 새기고 싶었는데. 마음과 생각 안으로 깊숙이 담고 싶었는데. 그렇게 마음을 먹을수록,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활자들이 멀어져 갔다.


그러니 책을 읽는다고, 글을 한자 더 적어내려간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는 걸. 숱한 이별을 경험하느라 지친 사람이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나는 그렇게 허탈해하고 있었다.


강남의 대형 서점에서 그녀는 말했다.

책이 많이 있으면 나는 뭘 읽어야 할지 오히려 더 모르겠어. 세상에는 책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이렇게 많은 책이 정말 필요할까?


어차피 책을 읽어도 바뀌는 건 없을 텐데, 아무리 글을 쓴다한들 똑같을 텐데, 좋은 문장을 읽어도 그때뿐일 텐데.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릴 텐데.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 그건 당연한 일일 텐데. 왜 우리는 책을 읽을까. 왜 우리는 이별을 경험했음에도 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걸까. 왜 그런 소용없는 일을 우리는 하루하루 계속하는 것일까.



6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이 나를 비껴간다고 느낄 때, 은희는 집에서 음악 소리를 크게 틀고는, 차라리 분노에 가까운 춤을 춘다. 펄쩍 뛰기도 하고, 온 힘을 다해 발을 구르기도 하고, 이유 없이 자신의 몸을 때리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영지 선생님의 말을 기억해낸다.


  “난 외로울 때 손가락을 봐.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부정할 수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하고 명징한 일.



7


내 작은 두 팔로 거대한 세상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섣불리 이해하려거나, 주제넘게 사랑하려 하지 말고, 가장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는 것이 차라리 더 옳은 태도인 것인지 모른다.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 가장 확실하고 명석판명한 것을 찾는 두 가지 원칙을 아래와 같이 세웠다.


먼저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을 찾을 것.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해볼 것.


1초를 날기 위해 90번의 날개짓을 하는 벌새처럼, 작고 사소한 목록들을 90번, 아니 900번을 계속해서라도 세상을 간신히 사랑할 수 있다면, 삶을 겨우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계속 찾으려 할 것이다.



8



  소용.

  쓸 곳. 또는 쓰이는 바.


‘소용’이 쓸 곳, 또는 쓰이는 바라고 한다면, ‘글의 쓸 곳’은 종이일 테고, ‘쓰이는 바’는 글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글의 소용’이란, 하얀 종이 위에 쓰인 검은 활자들. 그건 결국 글과 책이 아닌가? 당연히 서로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쓰임’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글은 글 자체로 자기 소용을 증명하는 셈이다. 다른 이미지나, 개념에 기대지 않고 글은 그 자체로 충만한 존재. 어디에 사용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 그런 존재 앞에서는 ‘소용’이라는 낱말이 굉장히 무례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글에게 물어야 할 것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가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내가 받아들여도 괜찮습니까?’라는 공손함이라는 것.


그러고보면, 글을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손가락을 움직인다. 한 소설가는 글을 쓸 때는 가장 수동적인 자세가 되는데, 그게 다행이라고 책에서 말했다. 그 말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수동적인 모습으로 글의 능동을 받아들이는 중일 것이다. 글은 그렇게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몸을 입어 페이지를 넘기기도 하고, 자정에 가까운 시간마다 연필로 서걱이며 고요하게 써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글은 매 순간 쓰고, 쓰이는 중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그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최선을 다해 활자 안으로 들어간다. 출구를 찾지 못해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헤매거나 서성거리면서. 간절하게, 그러나 담담하게.


그리고 나는, 그동안 손을 놓았던 일기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다. 하루는 내가 기록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 단위. 거기서부터 출발하자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9



나를 일제히 건너다보던 수백, 수천의 책들. 이미 내게 다가온 것과 아직 내게 다가오지 않은 것. 다가오고 있는 것. 그 모든 책들, 저마다의 일기가 내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온 힘으로 쓰였습니다. 당신에게 내 삶을 건네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오늘에 썼던 사람들. 오직 손가락이라는 고요하고 수동적인 것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거나 사랑해보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그것을 이뤄낸 사람들. 아니 그러기 위해 벌새처럼 필사적으로 애쓰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시간과 삶을 건너 영원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 담담하게, 그러나 간절하게 그들의 목소리를 나는 받아들이려고 한다. 문학보다 더 문학적인 책을, 일기를, 삶을. 그렇게 나의 글은 간신히 쓰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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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아트렉처 에디터_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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