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넘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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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중심지, 파리
지난 20세기 2차 대전을 전후로 이탈리아에서는 미래주의라는 사조가 태동하였다. 그들은 당대 급격하게 발전되던 기술의 속도와, 이에 의한 새로운 이미지에 몰두한 사조이다. 한편 그들은 이 같은 미래주의의 이상을 위하여 전쟁까지도 불사하던, 자신들의 예술적 신념을 위해 현실과 삶까지 저버릴 여지가 있었던 과격하고도 위협적인 사조였다. 이 같은 미래주의는 서구 전체를 관통하는 사조가 아니라, 이탈리아에 국한된 사조였다. 우리는 미래주의를 20세기 초반의 격동하는 시대상에도 관점을 맞추어 바라봐야 하지만, 미술계에서 이탈리아가 가졌던 지위라는 맥락 속에서 더욱 상세히 바라봐야만 한다. 분명 근대미술을 논할 때 이탈리아는 빠지지 않는다. 르네상스 전성기를 이끈 것은 당대에는 도시국가였던 피렌체와 베네치아로서, 이탈리아 지역의 두 도시국가들은 당대의 예술과 유행을 선도하였다. 그들이 고안한 형식들은 전유럽까지 퍼져나갔으며, 이는 바로크 초기까지 해당된다. 카라바조가 고안한 키아로스쿠로가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들인 벨라스케스나 프란시스코 리발타, 쥬세페 데 리베라를 비롯해 플랑드르 바로크, 프랑스 바로크의 고전주의 경향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허나 그러한 영향을 받은 프랑스 바로크는 그 내에서 더욱 독창적인 형식을 정초해냈고, 이후 로코코와 신고전주의 및 낭만주의를 비롯, 인상주의를 태동시키며 끝끝내는 모더니즘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래서 근대에 이탈리아는 저무는 영광에 상응하였고 프랑스, 특히 파리는 당대의 태양 그 자체였다. 찬란한 이탈리아의 영광은 이내 곧 파리로 넘어갔고, 그 영광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전까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파리의 풍광은 그것을 어떻게 담아내는지에 따라 당대의 유행과 화파, 기술 등을 드러내었다.
*플라뇌르
그리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파리의 풍경은 회화를 넘어서, 프랑스 내에서 조세프 니세포르 니에프스에 의해 발명된 사진에 담겨지곤 한다. 사진에 담겨진 파리 그 자체가 당대 프랑스와 파리의 영광과 진보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이 같은 20세기 중반, 모더니즘을 이끈 파리의 풍광을 드러내는 '매그넘 인 파리'전이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펼쳐진다. 가장 먼저 당대의 파리에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을 살펴보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사로나 드가 등 인상주의자들의 그림 속에서 파리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떠한가. 당대 태동한 개인주의의 여파로 서로가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풍토가 반영되어 대단히 차갑다. 더욱이 당시에 여유가 있는 부르주아지들은 어떤 목적성을 띠지 않고, 그저 남는 시간을 유희하기 위해서 파리 근교를 거닐곤 하였다. 그들 중에서도 남성 부르주아지들의 무관심적인 시선을 우리는 플라뇌르라 부른다. 이 같은 플라뇌르는 19세기 회화를 관통하며, 20세기의 회화 및 사진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선이라 할 수 있다. 허버트 리스트의 <몽마르트르>를 보자. 우뚝 솟은 견고한 도시는 흔들림 없이 포착되었다. 허나 인물들을 보자. 빠르게 지나가는 인물들을 포착하는 사진의 포커스는 흐릿하다. 개인과 개인들, 그리고 무리와 무리들은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저 거리를 거닐거나,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 여인의 시선은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다. 마치 그녀를 향한 응시를 거부하는 듯, 오히려 그녀를 향한 어떤 집중이 이례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시선으로 데이비드 세이무어의 <길에서 신문을 읽는 파리지앵>을 보자. 한 노신사는 신문을 향해 골똘히 집중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배경으로서의 세계, 타인들의 형체는 대단히 흐리다. 노신사는 신문을 읽는 자신의 행위 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지나가는 타인이나 흘러가는 세계가 아니라, 결국 주체적인 '나'인 것이다.
강을 바라보는 인물들이 포착된 엘리엇 어윗의 사진은 어떠한가. 어윗의 플라뇌르가 도드라지는 사진 속에서 중요한 테마는 개다. 플라뇌르를 가장 잘 보여준 인상주의 회화 중 하나인 카유보트의 <유럽의 다리>속에서는 한 마리의 떠돌이개가 다리를 활보하고 있다. 이 같은 개는 도로를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태도와 유사하다. 그들은 그저 한가롭게 시간을 때우기 위한 목적으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 뿐, 서로에게 별 관심은 없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뒷모습이 포착되고 있기에, 뒤편에 앉은 남자가 앞의 두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인지 일련의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 사이에 카유보트의 작품처럼 한 마리의 개가 지나간다. 이들은 쳐다볼 수 도 있겠지만, 개의 태도로 보건데 쳐다보지 않는 쪽에 가능성의 무게가 쏠린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저 한가롭게 강을 바라보고 산책하고 싶을 뿐이다. 브레송의 <멘 대로>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도 플라뇌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결코 집중하는 시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뚜렷 하다기 보단 대단히 느슨한 시선, 그는 그저 흘러가는 세계를 관조하고 있을 뿐이다. 지나가는 타인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카페에서 음료 한 잔을 마시며 타인에게 집중하기 위함이 아닌, 그저 나의 여가를 보내기 위해 흘러가는 시선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리라. 이 같은 플라뇌르는 인상주의 회화가 지향하던 일련의 객관성에 결부되었다. 그들이 마주하는 시각은 주관적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옮겨놓는 그들의 태도는 대단히 객관적이었기 때문이었고, 플라뇌르의 시선을 통해서 대상들에게 어떠한 정념도 품지 않고 세계를 화폭에 옮겨낼 수 있었다. 허나 본 사진들에서 사진가들의 시선 또한 플라뇌르라 할 수 있을까. <길에서 신문을 읽는 파리지앵>에서 노신사를 향한 명확한 주목과 배경을 흐리는 것, 또한 브레송이 창문 너머의 초상을 포착한 것은, 세계를 향한 객관적인 태도라기보단, 각 대상들에 대한 주관성의 투영처럼 보인다. 이 같은 재현을 넘어선 사진가들의 주관적인 날인과 의도, 표현 등이 모더니즘 사진의 특징으로 꼽히며, 인상주의에서의 플라뇌르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삶
이러한 인물들이 살아가는 파리의 풍경을 살펴보자.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로 예술의 중심지는 넘어왔고, 유럽 전체를 둘러봐도 심장은 곧 파리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도시의 역동성과 활기 또한 사진가들은 필름 속에 담아내었다. 로버트 카파의 <파리 증권거래소 풍경>을 보자. 문화 및 경제적으로도 유럽의 중심이 된 파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손짓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본 작품에서 인물들은 그리 역동적이지 않다. 허나 본 작품의 매력은 날카로운 시선에 있다. 프랑스 국채를 사고파는 급박한 증권거래의 찰나는 이를 응시하는 금융인들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드러난다. 그 날카롭고도 냉철한 시선과 북적거리는 구성이 역동적인 파리의 상황을 보여준다. 또한 당대의 파리를 지위를 있게 한 것은 자유와 민주의 도시라는 점에도 기인하였다. 이러한 바에 맞춰 자신의 권리를 투쟁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오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초상 자체가 건강한 활력 가득하던 파리의 모습을 전시는 조망한다. 데이비드 세이무어의 <1936년 8월 국가 비무장을 촉구하며 벌어진 평화주의자들의 시위>를 보자. 구도 자체는 낭만주의자인 프리드리히의 숭고한 구도를 연상케 한다. 세계는 거대하고 인물들은 작아 보인다. 하지만 그 작은 인물들의 군집은 마치 지구를 든 아틀라스를 연상케 한다. 그들의 이상과 권리를 노래하는 포스터들을 들면서, 손을 높게 뻗고 있기 때문이다. 시무어의 본 작품에서는 작지만 거대하고도 강인한 파리인들의 투쟁을 보여준다. <파리 생뚜엉에 자리한 제철 공장에서의 연좌 농성>은 어떠한가. 비스듬한 사다리의 위태로움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위협적인 환경에 상응하는 구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사선 구도와 흔들림 없이 굳게 서있는 노동자들의 포즈는 대비를 이룬다. 이를 사다리에 올라탄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운동감으로 담아내어 자신의 적법한 권리를 노래하는 그들의 초상을 흥미로운 형식으로 담아낸다.
*전후
한편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문화 경제적 중심지가 옮겨온 것처럼, 어쩌면 그 영광은 애초에 영원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로 파리를 비롯한 유럽 전역이 활력을 잃고, 아예 세계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예술,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파리의 지위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고, 세계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간 것처럼, 파리의 지위도 뉴욕으로 넘어갔다. 본 전시에서는 이 같은 전후의 파리의 풍경도 포착된다. 레오나드 프리드의 <센 강에서>는 전후의 쓸쓸함을 상징적인 풍경으로 드러낸다. 앞서 언급한 시무어의 시위농성 사진처럼 구도 자체가 인물을 대단히 작게 포착하는 대비가 도드라지는 파격적인 구도다. 허나 이 같은 거대한 세계를 이겨낼 힘이 없다. 인물은 중심에서도 벗어나 모서리로 향해 있고, 포즈 자체도 무력하다. 그가 마주하는 세계는 늦가을 내지는 겨울로 추정되며, 헐벗은 나무와 센 강의 차가운 색채는 너무도 불가해하게만 느껴진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의 무력함을 느끼고, 또한 서구의 중심에서 밀려난 파리의 입지가 이 같은 인물과 풍경의 관계에 다름 아니었을까. 마크 리부의 <자동차 옆의 수녀>는 어떠한가. 2차 대전을 전후로 기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도르노는 일원론적인 종교들을 파시즘의 맹아로 지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같은 풍토 속에서 본 사진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반항적으로 느껴지는 수녀의 표정, 그리고 조금은 삐딱한 그녀의 포즈, 또한 차의 체인과 결부되어 마치 수갑을 찬듯한 느낌까지 풍긴다. 이전까지의 수녀라면 분명 자애로운 표정과 바르고도 굳은 포즈를 취했을 것이다. 허나 1953년에 포착된 본 사진의 수녀는 다르다. 이 사진 속에서는 기성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이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파리는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을지언정 활력을 되찾았고, 또한 자유의 심볼임에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또한 파리는 1968년 전 유럽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68혁명의 중심지가 되는데, 브뤼노 바르베는 이 순간을 대단히 매혹적인 어둠으로 담아낸다. 어둠 속에서 불분명한 피사체들의 형체는 구분하기 어렵다. 분명 움직임은 포착되고 있지만 과연 어디까지가 공간이자 어둠이며, 또한 어디가 인물인가. 바르베는 이 같은 포커스 흐리기와 어둠을 중점으로 그 이후를 예측할 수 없는 68혁명을 효과적으로 필름에 담아낸다.
*로버트 카파
이러한 파리의 풍경은 사진을 예술적 지위로 끌어올린 사진가 그룹, 매그넘 포토스의 작품들로 채워진다. 설립자는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세이무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으로, 그들은 사진매체의 자율성을 추구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후술하겠지만 사진에서의 모더니즘을 이끈 사진가인 반면, 매그넘 포토스의 창립부터 1954년까지 회장직을 역임한 로버트 카파는 리얼리즘의 정신이 짙었다. 1913년 부다페스트 태생인 로버트 카파는 의료업에 종사하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진에 줄곧 관심을 보였고,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에바 베스요는 모더니즘 사진의 마찬가지로 선구자적인 인물로 꼽힌다. 허나 카파는 모더니즘 사진가라기보단, 르포르타주를 발전시킨 인물로 손꼽히는데, 이에는 그가 헝가리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큰 영향이 있었다. 그는 1933년 나치당의 발족 이후에는 파리로 망명한다. 허나 그는 결코 전장을 떠나지 않았는데, 파리로 망명한 그는 본명이던 엔드레 에르노 프리드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지금의 잘 알려진 이름으로 개명하고 유대인의 신분을 숨긴 상태로 온 전쟁에 뛰어들어, 당대의 참상을 여실히 담아낸다. 실제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기도 했던 그의 사진은 박진감이 넘쳐, 운동성이 느껴진다는 측면에서 영화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며, 유럽대륙에만 머무르지 않고 북아프리카, 인도차이나까지 향한 그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전쟁의 순간들을 여실히 기록하였다. 그는 저널리즘 사진의 정신에 대해 골똘히 탐구한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촬영 중 사망한 그의 최후까지도 저널리즘 사진의 본령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탐구하게 만든다.
이 같은 카파의 저널리즘 정신은 본 전시에서는 파리에서의 게릴라를 포착한 그의 사진들로 나타난다. 1944년 파리 수복 전투를 담아낸 그의 작품이야말로 그의 정수를 흠뻑 보여준다. 그는 직접 위험한 현장에 발 벗고 뛰어 들어가 그 참상을 기록하는 것을 사명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사명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급박함은 구도로서 드러난다. 본 작품의 구도는 기울어져 있다. 그것은 작품 자체로는 마치 세계 자체가 전쟁에 의해 위협받아 기울어지는 듯한, 우리를 위협하는 전쟁을 고발하는 형식처럼도 느껴진다. 허나 카파는 이를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 작품은 정교한 형식미로 포착한 사진이 아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을 보라. 왼편의 나무나 바리케이트는 정교한 형식미를 지향한 사진이라면, 너무도 엉성하게 잘려나가 있다. 카파는 급박한 순간을 옮겨 담으려했던 것이지, 완전무결한 세계를 구축하려 한 것이 아니다. 필름 속에 담긴 부상병을 옮기는 의무병들의 움직임도 급박하며, 그것을 촬영하는 카파의 손과 발도 급박하긴 매한가지다. 이 같은 사진의 기울임은 마치 영화에서의 핸드 헬드처럼,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려한 카파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와 거리의 어둠과 내달리는 의무병의 옷을 수놓은 순백의 대비도 매혹적이지 않은가. 전쟁에 의해 어둠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서 회복해야할 것은 이 같은 새하얀 선의 정신에 다름 아닐 것이다.
*데이비드 시모어
카파와 함께 설립자인 데이비드 시모어 또한 카르티에 브레송의 모더니즘보다는, 카파가 지향한 저널리즘 사진을 발전시켜나가는 경향이 짙은 사진가였다. 그는 1911년 바르샤바 태생으로, 카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다. 어쩌면 카파와 시무어는 서로 당대의 참상, 특히나 유대인들이 나치즘의 광풍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현실을 고발해야한다는 사명이 있었으리라. 유대인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전쟁터에서 사망했다는 최후 또한 카파와 동일하다. 카파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하며, 시무어는 수에즈 전쟁을 취재하다가 1956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또한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카파가 역임해온 회장직을 시무어가 이어받아, 1954년부터 1957년 그의 최후까지 역임하며 마찬가지로 그룹의 중추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1942년 미국으로 귀화하여 나치즘의 광풍을 피했고, 카파와 마찬가지로 생생한 전장을 포착한 사진들이 일품으로 평가받는다. 허나 카파와 대비하여 그의 독창적인 영역으로 평가된 것은 아이사진이었다. 그는 전쟁, 특히나 어른들의 충돌에 의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에 관심 가졌다. 그래서 카파의 사진들이 전장의 박동감에 주목한다면, 시무어는 그보다는 서정적인 편으로 전쟁이 미치는 여파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유네스코 소속으로 이 같은 전쟁 속의 아이들의 삶을 포착하였으며, 카파의 사진이 전쟁 그 자체의 체험이라면, 시무어는 전쟁의 이면과 이후를 골똘히 생각하게끔 인도한다.
본 전시에서 시무어의 특징적인 전쟁 속에 놓인 아이들의 사진은 소개되지 않는다. 허나 전쟁 속에서 민간인에 집중하였듯, 살아 숨 쉬는 개개의 삶을 포착하려는 그의 의도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여럿 소개된다. 플라뇌르라 할 수 있는 작품들 사이에서 시무어의 <시장에서 부대자루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남자>라는 작품이 소개된다. 그의 뒤편에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플라뇌르랑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결코 행색이 추레한 이 남자에게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시무어는 그에게 집중한다. 남자의 눈은 피곤해 보인다. 하지만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날카로운 눈에는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노동에 의해 축 처진 듯한 그의 육체와 대비를 이룬다. 이렇게 시무어는 도회적이고 풍요로운 파리의 이면을 포착한다. 피곤해보이고 추레해 보이지만 힘이 느껴지는 강렬한 눈빛, 플라뇌르의 무관심으로는 결코 포착해내지 못할 삶의 단면이다. 그리고 아이 사진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은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소년>이다. 마찬가지로 구도가 일련 느슨히 기울어져 있다. 소년의 표정은 모호하다. 찡그린 표정과 웃는 표정 그 사이에 놓인 것 같다. 과연 시무어는 즉흥적인 찰나를 포착한 것일까, 아니면 웃으며 노동해야만 하는 아이의 어깨에 짊어진 노동의 무게가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린 것일까. 분명한 것은 결코 심미적인 사진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전시 구성상 플라뇌르에 둘러싸인 그 아이의 외침은 무관심을 향한 절절한 존재의 증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다음으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이다. 일단 그의 생애는 1908년, 예술과는 거리가 먼 섬유회사를 경영하는 부모의 밑에서 태어났다. 어쩌면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그가 모더니즘 사진을 이끌게 된 일련의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사진은 브레송 이전과 이후라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1927년~28년에 큐비즘 화가인 앙드레 로트와 함께 회화를 공부하였는데, 어쩌면 회화 고유의 2차원적인 캔버스 내에서 이뤄지는 자율적인 표현을 도모하는 큐비스트와 함께 시각미술을 연구했다는 점 또한, 그가 사진에서의 모더니즘을 이끌게 된 큰 영향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1930년부터 사진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1933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이 열려 주목받기 시작한다. 브레송의 이해는 곧 모더니즘의 이해와 동일시되는 측면이 있다. 회화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엄밀한 재현은 그들의 영역이 더 이상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3차원을 옮겨놓는 일은 사진의 일이었고, 벨라스케스나 앵그르와 같은 엄밀한 재현가들이 있어도, 근접해서 바라본다면 결국 붓 터치와 마티에르가 보이기 마련이다. 이렇게 회화에서는 더 이상 재현을 그들의 영역이 아니라 일축하였지만, 한편 사진에서의 모더니즘도 온당 재현만이 그들의 본령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진에서의 모더니즘은 단순히 대상의 재현과 가리킴을 넘어서, 사진 속 형식적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는 형식주의와, 비춰지는 대상이 아닌 그것을 찍은 순간과 셔터를 누른 사진가의 위치를 환기시키는 주관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브레송의 작품들은 당대 사진들의 재현된 바를 피상적으로 감상하는 접근법에 그쳐선 안 된다. 그의 의도적인 포커스 흐리기나 빠르게 지나가는 피사체를 즉흥적으로 촬영한 것은 대상의 재현보다도, 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강조된다. 또한 그는 당대의 초현실주의에도 관심을 가져, 회화에서처럼 진취적인 초현실주의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대상의 외피를 넘어서는 무의식과 본능을 포착하려는 시도, 대상의 내면을 드러내는 공간과의 교응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본 전시장에서 특별관에 브레송의 작품들은 헌정된다. 그의 대표작인 1985년의 풍경 사진을 살펴보자. 그는 공장지대와 에펠탑의 풍경을 담아낸다. 하지만 본 사진은 단순한 풍경으로 보이진 않는다. 일단 지상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소비하는 연료의 색채와도 같은 어둠이라면, 그 연기를 받아들이는 하늘은 새하얀 풍경으로 흑백의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허나 이 같은 하얀 하늘 위에, 더욱 두텁고 어두운 먹구름이 존재한다. 본 풍경은 단순히 흑백대비만을 이루지 아니하고, 더욱 풍부한 차원의 세계를 형성한다. 이 같은 대지와 새하얀 하늘, 그리고 먹구름 각각을 매개하는 듯한 대상으로 에펠탑이 솟아있다. 또한 대지에 발붙이고 있는 그 에펠탑은 곧 땅으로 내려앉을 것만 같은 먹구름을 마치 아틀라스처럼 지탱하는 듯하다. 즉 브레송은 단순히 공장이나 구름, 에펠탑이라는 대상을 재현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각각의 대상들의 조화를 토대로 그가 원하고자 하는 풍경을 만들어내며, 이는 분명 현실이면서도 온당 객관적인 현실이라 말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의 풍광이다. 즉 1985년의 <무제>는 평면적인 구도 속에서 세계와 차원을 구획해내는 탐미적인 속성을 보여주면서도, 이를 구축하기 위한 브레송의 주관적인 속성이 결코 배제되어 있지 않다. <세인트 라자르 역 뒤편 유럽 광장>을 살펴보자. 본 작품 또한 마찬가지로 대단히 탐미적이다. 수면 위에 현상계의 대상들이 비춰지며, 마치 한 차원 속에서 두개의 세계가 공존하는듯하다. 허나 이러한 풍광은 결코 카파나 시모어의 르포적인 사진처럼 현실을 포착하는 것에 만족한 사진이 아니다. 본 작품에는 브레송의 공간에 대한 정교한 제어와, 아이가 뛰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그의 집념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이 같은 아이의 점프 자체가 브레송의 정교한 통제 하에 놓여 있다. 결국 뛰는 대상과 물에 비치는 풍경은 재현되는 대상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 그것을 포착하는 브레송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관련된다. 과연 그는 대단히 황홀하고도 신묘한 본 풍경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현상계에서의 삶과 그것과 거꾸로 놓여있는 똑같은 세계의 모습, 그것은 우리의 삶 이면에 존재하는 죽음은 아닐까. 언제나 삶과 한 쌍으로 존재하는 죽음의 존재, 브레송은 사진을 모더니즘의 차원으로 진입시키며 마치 홀바인의 <대사들>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낸다.
*정리
이러한 매그넘 포토스의 주요한 기수들과 사진에서의 모더니즘 이외에도, 본 전시에는 풍부한 볼거리로 가득하다. 20세기를 넘어서 컬러가 수놓아진 21세기로 파리의 풍경을 확대시키기도 하며, 우리가 익히 파리에 기대하는 낭만적인 풍광들로도 가득하다.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20세기 프랑스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인물들의 초상도 본 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매그넘 포토스의 현존하는 전설인 엘리엇 어윗의 작품들 또한 단독한 관에 헌정된다. 이러한 본 전시는 파리라는 도시의 역사를 포착하며 흥망성쇠라는 어쩌면 피할 수 없을 운명을 환기시킨다. 이 같은 운명은 모더니즘에 진입하는 사진의 역사와, 발전되는 르포 사진의 경향 속에서 포착된다. 전자로부터는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고 가리키는 수준에 지나지 않고, 그것을 촬영하는 사진가의 위치를 환기시키고, 사진의 고유한 형식을 발전시키는 역사가 스며있다. 그리고 후자로부터는 혼란했던 20세기 중반의 참상을 즉흥적으로 촬영하려던 사진가들의 사명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파리의 풍광에만 도취되지 아니하고, 사진 고유의 매력과 그것을 촬영한 사진가들의 일대기에도 흠뻑 몰입한다. 전시의 무수한 작품 수는 여유를 갖지 않는다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도 있겠지만, 그만큼 풍부하기에 파리라는 도시와 사진에 대해 기대하는 많은 기대들을 충족시켜 줄 것이다. 다만 진정으로 좋았던 작품들의 경우에는 제목 등을 기록해두는 것을 추천한다. 도록에 본 전시에 소개된 모든 작품들이 수록되어있지는 않아있기에,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좋았던 감흥들은 그저 휘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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