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호소에 응답을 요하노니
https://artlecture.com/article/1384
"인권이란 바로 약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 -로맹 가리-
지난 2019년 12월 22일 미국의 CNN은 2010년대를 정의하는 100장의 사진을 선정했다. 본 리스트에는 2010년을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을 드러내는 사진들이 선정되었다. 각각의 사진들 모두가 인상적이지만, 본 글에서 다룰 사진은 포탄이 일으킨 회색빛 재를 온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머리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며 앉아있는 한 아이의 초상이다. 표정에 기쁨과 환희로 가득해야 할 아이는 침울하다 못해, 어떠한 것도 쳐다보지 않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낙담해 버린 듯한 공허한 시선을 띠고 있다. 아이의 기운 없는 무력한 손과 발은 그것을 마주하는 우리들조차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주변 공간으로 보건데 분명 구조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이 사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본 사진은 2010년대 중동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에 다름 아닌 시리아 전쟁을, 가장 치열한 격전의 장이 되어 생지옥에 다름 아니게 된 알레포의 현실을 관통하는 사진이다. 전쟁에서 민간인들의 희생, 특히나 본 비극에 대한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았고, 책임도 없으며 선택권도 없었던 아이들의 희생은 지양되어 마땅하다. 그것은 결코 전쟁의 목적을 위한 희생으로 승화되어서도 안 되지만, 시리아 전쟁이 띠는 특수성이라면 그러한 희생의 목적 또한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시리아 내전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시리아 전쟁의 초기는 현 정권에 대한 시리아 시민들의 응징에 다름 아니었다. 허나 시리아 정권은 이 같은 시민들의 거센 항의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시아파 동맹국인 이란을 끌어들여 자국민들을 진압하고자하였다. 하지만 시아파에 대한 믿음은 왕족 및 귀족들에 국한된 것으로, 시민들의 다수는 수니파를 믿었는데, 이에 수니파의 맹주들도 시민들의 편에 서서 반군에 가담한다.
하지만 개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세가 커진 ISIS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미국이 개입하였고, 중동에 대한 세를 넘기고 싶지 않음과 더불어, 체첸 사태 이후 수니파의 부흥을 억제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개입까지 더해진다. 이에 작금의 시리아 전쟁은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그 사투는 어떤 목적을 띠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애초에 희생되어서도 안 되지만, 만약 희생된다면 숭고하게 승화되어야 마땅할 아이들의 희생도 그저 목적을 알 수 없는 진창 속의 죽음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같은 시리아의 참상을 와드 알-카팁 감독이 에드워드 와츠 감독과의 협업으로 고발한다. 그녀는 시리아의 참상을 직접 취재하는 생생한 취재르포의 영역에서, 이를 자신의 출산과 아이에 대한 문제와 엮어내어 역사와 자신의 관계, 즉 자전적인 영화로 확장시킨다. 그 자전적인 영화의 시작은 알레포로 떠나기 이전 감독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서 행해진다. 알레포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시리아 전쟁까지 확대된 지금에 그 사건들을 생생히 기록한 현재의 그녀와 사진에는 일련의 간극이 있다. 미래에 대한 열린 희망과 환희로 가득한 과거의 초상, 그것은 시리아 전쟁을 몸소 겪고 기록하며 그 처절한 상흔과 고통을 육신에 새겨낸 작금의 그녀와 분명 다르다. 그리고 이 초상은 움직이는 영상으로 뒤바뀐다. 허나 그녀가 아니다. 과거에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여 알레포로 향한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건 오직 그녀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허나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고, 또한 프레임을 가득 채우며 그 중요성을 입증하는 대상은 그녀의 딸이자 선택의 책임인 딸 사마이다. 영화는 시리아 전쟁 내에서 진정으로 되돌아봐야 할 얼굴, 전쟁의 책임을 아이의 얼굴로서 환기시킨다.
와드 감독은 알레포에 거주하며 그 참상을 카메라, 특히 정부군 및 러시아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한 수단인 핸드폰으로 기록한다. 이로 인해 구축된 비교적 불투명한 숏들, 급박하게 움직이는 핸드헬드, 그것은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픽션의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리아 전쟁의 현실 그 자체에 상응하며, 특히 그 형식성을 생각할 새도 없이 내용과 동화된 형식에 다름 아니다. 이 같은 형식에 담기는 익스트림 롱숏의 잿빛 풍경, 자욱한 어둠과 안개 속에서 불완전한 조명, 텅 빈 공간, 처절한 사람들의 초상들은 암담하기 그지없다. 허나 도시의 정경을 비추던 감독은 태양을 비춘다.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듯이 말이다. 영화는 촬영이 종료된 시점인 2016년으로부터, 촬영이 시작된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려오며, 민주화 운동에서부터 시리아 전쟁까지의 타임라임을 그려낸다. 그 방법은 미시적으로 그들이 회복하고자 하는 삶의 단편들, 한편 전쟁에 의해 파멸되어 버린 개개의 삶과 이상에 관련된다. 2012년 민주화 운동의 시작은 굳게 닫힌 철문을 깨부수는 것으로부터 이뤄진다. 거리를 가득 채운 시민들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처음에는 포커싱이 나가 흐릿하다. 마치 민주화 운동 이전의 그들처럼,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정부의 태도처럼 말이다. 허나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는 그들의 초상은 포커싱이 회복되며 뚜렷하게 포착되기 시작한다. 그들이 바라는 민주화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국가, 종교, 이념, 구조 내에서 무색무취의 익명적인 일원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개인의 자유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로서 말이다. 영화 속에서는 비극 속에서의 행복이 교차되곤 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결혼과 임신, 출산, 양육, 감과 같은 감각을 자극하는 유희 등, 동시대의 다른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뤄지는 권리에 다름 아니다.
허나 그것은 박탈되어 있다. 위태로워선 안 될 것을 일상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바로 그들의 열망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에 색이바랜 버스에 아이들이 채색을 하지 않던가. 민주화 운동을 비유한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념, 구조, 종교, 국가의 광풍 속에서 마치 소설 『모모』 속 회색인간처럼 색을 잃어버린 자신들에게, 다시금 진실한 색을 입히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회색 시선에서 대단히 불편한 일이다. 자신들의 보편에 대한 공고한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 자유는 다른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아니하며, 또한 인류라면 누려야할 가장 근본적인 기본권의 영역과 관련된다. 권력을 유지하고자하는 부정한 지도자들은 그 불편함을,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는 보편의 시선에 반하는 개별자들의 '숭고함'을 짓밟고자 한다. 허나 시민들은 자신들이 지니는 그 숭고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고위직에 다름 아닌 의사이자 그녀의 연인인 함자도 운동에 동참한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이나 권위의 영위는 어쩌면 정부군 편에 붙는 것에서 가능할지 모른다. 허나 함자는 권위자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자신을 바라는 것이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전쟁에 항거하며, 그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본령을 회복하는 일에 관련될 것이다. 또한 타인의 생명, 자유를 존중 및 긍정하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리의 자유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의 곁에는 언제나 타인들이 둘러싸여있으며,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그들과의 소통, 교감 속에서 이뤄진다. 만약 그들을 해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닌 방종일 것이다. 그래서 병원을 재건하여 타인의 자유가 영위될 수 있게끔 돕는 것, 또한 타율적으로 세상에 떨어져 다시 한 번 타율적인 죽음의 위기에 처한 5개월 아기를 구하는 것은, 살아있음에 가능하고 또한 서로의 삶을 존중함에 가능한 자유로의 나아감, 그리고 인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본 극은 생생한 기록의 영화에 다름 아니다. 감독 와드가 줄곧 카메라와 핸드폰을 놓지 않는, 그 집념을 통해 우리는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가장 먼저 시리아의 참상은 과연 외부에 얼마나 잘 알려져 있는가. 정부군과 이에 가담하는 이란, 러시아는 그 내부의 참상을 지속적으로 은폐하려 할 것이다. 폭격, 학살에 의한 그 무수한 희생자들은 그들에 의해 은닉된다. 또한 텍스트는 아무리 세세하고 감각적이라 한들 감상의 견지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와드의 기록에 대한 집념은 진실의 현시, 생생한 그것의 시청각적 체험과 관련될 것이다. 그리고 와드는 죽음을 기록한다. 항거하다 죽은 성인들에서부터, 폭격에 의해 목숨을 잃은 무수한 민간인들, 특히 아이들의 죽어가는 모습이나 주검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진실의 밝혀냄과 관련됨과 동시에, 일련의 존엄과 관련될 것이다. 그것을 자신들의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고, 왜곡하는 정치권력의 야만은 심히 비인간적이다. 희생자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죽음이거나, 보편을 위한 적법한 집행이 되어버린다. 허나 우리는 그러한 죽음에 마땅히 경각심을 느끼고, 유한한 그 삶이 무한하게 피어나지 못함에 슬픔을, 또한 그 죽음에 의해 대지에 발 딛고 있는 우리의 삶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를 기록하는 영화는 숭고한 희생과 존엄을 환기시키고, 일상이 되어버린 죽음 앞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할 인간성을 기록으로서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그 기록은 후대에의 전승과 관련된다. 병원에서 자욱한 핏빛 풍경에 익숙해진 그녀는, 이 같은 과거의 시야가 줄곧 현재에 아른거린다고 고백한다. 과거는 우리와 분리, 단절되지 아니하고, 현재 총체로서의 우리 안에 축적되고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이 같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미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본 극은 시리아의 참상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참상을 후대에, 특히 사마에게 전승하기 위한 역할도 띠고 있다. 그것을 마주하게 될 사마를 이루는 과거의 기록, 이 기록은 사마의 총체에서 분명 무수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사마에게 전승하기 위한 기록의 의미는 역사와 과거의 역할을 환기시킨다.
본 작품은 시리아에 대한 영화임과 동시에, 사마에 대한 영화로서 아이들을 위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강렬하게 호소되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의 초상이다. 폭격에도 불구하고 순진무구하게 분유를 마시는 아이들, 또한 새근새근 졸고 있는 아이들의 초상은 전쟁에서 유리되어 보인다. 실제로도 그래야만 한다.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시작된 전쟁, 태어났다고 한들 소수 정치권력의 아집과 충돌에 의해 발생한 전쟁에 어떠한 책임도, 관계도 없는 전쟁은 분명 아이들과 유리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본 극에서 아이들의 초상은 어떠한가. 자신이 행한 선택도 아니고, 우리가 막을 수 없는 불가해한 자연의 변덕도 아닌, 오직 어른들의 아집으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을 곁에서 떠나보내곤 한다. 또한 그들이 곁에 머물던 친구, 형제들을 영영 떠나보냄에 아이들의 눈에서는 서글픈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은 재를 뒤집어쓴 아이들의 얼굴에 흔적을 남긴다. 눈물의 흔적, 폭격의 파편에 의해 흘러내리고 이내 곧 말라붙은 피의 흔적, 아이들의 얼굴에 결코 남겨져선 안 될 절망적인 흔적들이 새겨지고 이는 결코 지워질 줄 모른다. 또한 아이들은 거울로서 사회와 어른들의 행태를 체화하지 않던가. 그들은 행복, 기쁨, 명랑함, 감정, 자유를 모방하지 아니하고, 조숙함, 슬픔, 우울을 체화한다. 그것은 온당 어른들의 책임, 영화는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환자들 중 하나는 바로 이 같은 아이들이다. 함자를 비롯한 의사들은 이 아이들을 살리기에 고군분투한다. 특히 영화 속 가장 강렬한 시퀀스 중 하나는 만삭의 임산부와 사산될 위기에 처한 아기를 살리는 장면이다. 숨을 쉬지 않고, 그 육체에선 어떠한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으며, 창백하게 피부색이 바래버린 아기, 그 비참한 현실 속에서 태어나는 것조차 거부되는 것인가. 허나 아이들의 생명은 어른들에 의해 영위되고 지켜져야만 한다. 기적처럼 그 아이와 임산부 양자 모두를 살려낸다.
이 같은 생지옥 속에서도 아이들의 열망을 지켜주는 부모들, 그리고 생명을 지키는 것, 특히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아이들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야 말로 문명, 국가, 제도, 구조의 역할이 아닌가. 영화는 바로 그런 권리에 대한 절절한 호소다. 이러한 초상들이 띠는 눈물, 애환, 비통, 절망은 너무도 생생하다. 아이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라는 한 어머니의 처절한 모성, 그것은 차마 외면하기 어렵다. 그 얼굴들에는 비교적 전쟁과 유리되어 있는 평화로운 영화관에서 이를 감상하고 있는 안락한 우리들을 불편하게끔 만든다. 영화관에 앉아있는 우리의 행복은 비교적 지속된다. 허나 우리가 바라보는 그들의 행복은 너무나도 순간적이다. 와드와 함자 두 부부의 키스, 사마와 함께 노니는 여가와 휴식은 언제나 근접해있는 폭격이 위협한다. 이 같은 위협들을 겪는 시리아의 구성원, 특히 정부에 반기를 든 반군들은 우리들로부터 타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몰랐던 것, 우리가 알고 있더라도 생생히 목도하지 못한 것들을 마주하게 만들어준다. 이들은 평온함과 안락함이라는 테두리에 갇힌, 세계의 비극에 대해 상상하지 못한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어준다. 또한 특히 아이들로부터 우리는 외면하지 못할 호소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자신의 국적도, 성별도, 인종도, 속한 구조도 아무 것도 모르는, 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은 타자인 아이들, 그들은 단지 우연한 불행에 의해 시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평온히 앉아있는 다른 국가들의 감상자들은 그저 우연한 행운으로 어떤 국적을 타고나고,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 같은 자신들의 행운과, 타자의 불행으로부터 인류애적인 책임을 느낀다. 나는 곧 무수한 타자들의 둘러싸임에 의해, 또한 그들과의 차이에 의해 형성된다. ‘나’는 그들에게 크든 작던 책임이 있다. 허나 우린 결코 그곳으로 뛰어들 순 없을 것이다. 허나 그들의 호소에 응답할 수는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커다란 비극들, 그리고 동시대에도 진행되는 무수한 비극들은 그 호소들의 외면에서 비롯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 호소에 응해야만 한다.
자신들의 모든 삶을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저널리즘 정신을 선보이는 와드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료인의 본령을 보여주는 함자, 두 부부의 희생은 일상의 순간들과 교차되며 펼쳐진다. 타자들의 호소에 응답하는 우리의 방식도 그러하면 될 것이다. 나의 일부를 분유해낼 수 있는 희생, 그럼에도 나를 지켜낼 수 있는 희생을 말이다. 그것은 곧 그들을 위한 공간의 재건으로 이어질 것이다. 병원이 폭격당하는 순간에서부터 시작되는 본 극은 사람들을 둘러싼 공간, 이념, 구조, 국가에 대한 탐구 또한 돋보이는 작품이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모여 있는 알레포는 개개의 삶을 존중한 개개인이 모여서 형성된, 삶을 위한 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위협 속에서도 때때로 웃음이 피어나고, 또한 정원이 있고 좁지만 편히 누울 수 있는 작은 집이 있는 공간, 그것이 바로 반군들이 요구하고 바라는 공간에 다름 아니다. 허나 그들에게 폭격을 쏟아내는 정치권력들이 바라보는 공간은 어떠한가. 그들의 권위를 위해 되찾고 함락시켜야만 하는 공간,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 공간 그 자체이다. 폭격에 무너져가는 건물들, 자욱하게 뒤덮인 재와 먼지, 적막과 침묵, 인적 없음에 유령도시처럼 느껴지는 공간, 자라지 않는 나무들, 그들의 공간에는 생기가 부재한다. 와드와 함자 두 부부는 안락한 자신들의 공간에 내린 소복한 눈 위에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 공간에는 무언가가 창조된다. 허나 정치권력은 공간을 두고 삶이 희생되기를 바리기에, 그들의 공간에는 오직 죽음만 있을 뿐이다. 결국 와드와 함자 부부도 알레포에서 떠나가지 않던가. 하지만 그 희망을 놓지 않는다. 살아남았기에, 두 아이들로부터 책임이 있기에, 그들은 권리를 투쟁할 것이다. 그 폐허에 맨 처음 병원을 구성한 것처럼, 다시금 그들은 병원을 세우고 다른 시설들을 재건해낼 것이다. 하늘을 의미하는 사마라는 이름에 걸맞은 광대하고도 웅대한 하늘을 되찾기 위하여 그들은 투쟁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오프닝에서 열렸던 그 철문은 다시금 닫혔지만, 삶을 위한 투쟁에 다시금 그 문은 열리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공간에서 가져온 장미 한 송이, 그것을 심음에 그곳의 추억과 정신은 그들이 옮겨온 그것으로 이식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의 알레포는 폐허가 되었을지언정, 카메라에 담긴 알레포의 순간들은 반영구적이고 생생하지 않던가.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든 여인, 와드 알-카팁이 담아낸 생생한 시리아의 참상, 그리고 자전적인 이야기, 그것에 우리는 영화, 특히 기록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된 것을 통해 우리는 타자의 의미를, 또한 타자에게 지녀야할 우리의 태도를 되새겨본다. 이러한 타자의 생명과 권리가 위협받은 사건들이 과연 우리에게 닥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우리는 과연 그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 있을까, 범적인 인류애는 다름 아닌 이런 참상 속에 쓰여야하지 않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이러한 점에서 타자의 중요성을, 그 호소에 응하라 하지 않던가. 특히나 구조나 국가로부터 규정되기 이전, 우리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로부터 선행된 순일한 상태의 타자인 아이들의 호소는, 그런 것을 이유로 들어 참상을 외면하려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세상에 맞아들여져 이제는 어른이 된 우리들은 이제 타자들을 세상에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특히나 그 맞아들여짐에 어떠한 책임도, 선택권도 없는 가장 나약한 타자들인 아이들을 우리는 어떻게든 맞이하고 보듬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잘 맞아들여졌고 작금에는 이를 구성하는데 영향이 있기에, 이제는 우리가 그것에 응답할 차례다, 우리에겐 사마를 비롯한 아이들을 맞이해야 하는 그런 책임이 있다.
글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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