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와 그에 대한 비판들
Albrecht Dürer, [Method of Perspective Construction], 1525
빛으로 그리는 그림, 사진
사진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와 그에 대한 비판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실재하는 것에 대해 다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에는 '사진'이라는 장르가 존재한다. 사진은 그것이 처음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여러 논쟁을 가져왔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오랜 시간을 걸쳐 대상을 분석하고 화폭에 옮기는 화가들과는 달리 사진가들은 짧은 시간에 사진기라는 도구의 능력을 빌릴 뿐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필히 사진기라는 물체를 통해 구현된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비판은 과거 사진가들에겐 꼬리같이 따라붙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떠한가. 사진이라는 장르가 하나의 예술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술 사진'이라는 말의 사용이 늘었고, 사진가의 작업을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향유하는 관객들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단순히 똑같이 재현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사진은 오늘날 온전한 예술로서 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사람들은 사진을 단순히 사진가와 카메라의 결합에서의 탄생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사진가와 사진기, 피사체 사이엔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게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작가의 '의도'이다. 우리는 사진이라는 결과물을 통해 잠시나마 사진가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을 동일시해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오늘날 사진가라는 말보단 사진작가라는 말이 더 폭넓게 사용되는 것이다. 화가가 정해진 화폭 안에서 다양한 색과 기법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다면, 사진작가들은 대상에 내리는 빛의 온도와 주체와의 거리 등으로 그들의 세계를 표현한다.
You don't make a photograph just with a camera. You bring to the act of photography all the pictures you have seen, the books you have read, the music you have heard, the people you have loved.
-Ansel Adams
사진은 빛의 그림이다. 빛이 없으면 사진은 무의미해진다. 빛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모양이 바뀌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도 변한다. 우리 모두에게 비추는 빛은 대상을 찬란하게 빛나게도, 한없이 초라하게도 만든다. 사진가는 바로 그런 빛을 응용하는 사람이다. 19세기 후반의 인상파 화가들이 빛에 따라 달라지는 인상을 캔버스에 표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것처럼 말이다.
한편, 앞선 글에서 사진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늘여놓았지만 여전히 사진이, 재현적 작품이, 실제와의 닮음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해선 많은 비판들이 있다. 사진은 사진일 뿐 실재하는 대상을 온전하게 닮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만드는 과정에선 당연히 왜곡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원본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하이퍼 리얼리즘 Hyperrealism'이라는 미술의 방식으로 반박해볼 수 있다. 하이퍼 리얼리즘이란 본래 사진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사진, 이미지가 넘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재현인가에 대해 쉽게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고 하이퍼 리얼리즘 작가들은 그것을 두려워했다. 우리가사는 세상은 우리가 원본이자 주인인데, 어느 순간부터 복제가 원본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진에 대한 다른 이들의 비판에서 예술을 시작했다.
결국 대상을 실재보다 더 실재같이 모사하는 수련의 시간을 통해 원본에 대한 오롯한 이해를 경험하는 것이다. 사진과 미술 중 어느 것이 더 원본을 닮아있는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사진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진 덕에 우리는 원본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하게 되고, 새로운 면을 찾게 되며 결국은 원본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또 다른 비판의 가능성은 사진의 복제에 관련되어있다. 사진이 대량으로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 예술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번 카메라로 담은 이미지는 언제든지 쉽게 현상되어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회화적으로 수고를 거쳐 작업을 복제하는 것들과는 다른 분야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비슷한 맥락의 비판은 팝아트 화가 앤디 워홀 Andy Warhol에게도 따라붙었다. 그는 대량으로 물건들이 뽑아져 나오는 산업화의 시대에서 우리가 매일 먹고 소비하는 것들을 작품에 끌어왔다. 그리고 '실크스크린 Silk Screen'이라는 기법을 통해 무려 대량으로 작품을 생산한다. 그는 대량생산을 하나의 예술 창조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작업들이 모두 동일한 모습을 지니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조금씩 판을 밀고 내리면서 작품을 제작했다. 그렇기에 각각의 작업은 조금씩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Andy Warhol printing a Marlon Brando canvas at the Factory
https://www.youtube.com/watch?v=CzrPmfaYcMM
한 번 찍은 사진을 백 장 출력한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백 장이 다 똑같다고 볼 수 있을까? 사진을 출력하는 과정에선 출력기라는 매체가 한 번 더 개입된다. 출력기에 들어가는 잉크는 그 종류에 따라 심지어는 사진을 인화하는 날의 날씨와 습도에 따라서도 결과물을 다르게 만든다. 사진을 출력하는 인화지는 어떤가. 그 재질과 평량에 따라 결과물은 달라진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나와 친구들은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은 인쇄를 피하는 편이다. 종이가 습도를 많이 먹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인쇄가 나올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출력할 곳을 정하거나, 어떤 경우엔 본인이 직접 현상하는 과정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는 워홀이 수동으로 실크스크린에서 보여줬던 노력들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도 우리는 사진을 접한다.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내 모습을 프로필 사진으로 저장하기도 하고,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사진을 엿보기도 한다. 사진과 같이 원본은 재현하는 것에 대한 행위가 예술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은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기술과 미디어가 발전함에 따라 그 이유들이 변화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 속에서도 사진은 굳건히 예술의 영역에 속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진기와 사진 사이엔 항상 작가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가의 시각과 의도가 있는 이상 사진은 더 이상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하며, 예술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아트렉처 에디터_윤정민
Artlecture.com
Create Art Project/Study & Discover N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