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디자인 100년 / 성곡미술관>
19세기 말에 디자인은 양 극단을 나뉘어져 있었다. 단순히 생산의 수단혹은 생계 이후의 것이었다. 생산의 수단으로서의 디자인은 최소한의 기능만을 목표로 했으며, 생계 이후의 디자인은 귀족적인 것이자 불필요한 것이었다. 디자인이인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역할에 대해 문제가 제기된 것은 산업사회의 장밋빛 유토피아가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였다. 최초에 윌리엄 모리스가 최소한의 기능만을 갖춘 질 낮은 제품이 공장에서그대로 대량생산되는 것을 지양하며 질 높은 수공예를 지향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예술 수공예 운동은 산업혁명에반대하며 장인 개개인의 수공예적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운동이었다.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이러한 정신을산업사회와 결부하여 한 단계 더 높이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1907년,그의 주도하에 독일디자인연맹(Deutsche Werkbund, DWB)이 창립되었다.
DWB는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과 건축가들로 구성되어 새로운 디자인의 실험을 주도하며 다른 단체들에 많은 영향을주었다. 디자인연맹이 처음부터 순탄대로를 거쳐 그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의견 속에서 디자인연맹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통해 지금의 우리가아는 독일디자인연맹이 탄생한 것이다. 무테지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양식style이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닌 사회에 의해서 결정되며 집단적 노력이 동반되는 ‘규격화typisierung’를 통해 시대양식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예술 수공예 운동의 가치를 수계한 아르 누보(Art Nouveau) 스타일의 예술가들은 개인주의와 독창성을 기반으로 한 제품디자인을 추구했다. 벨기에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헨리 반 데 벨데는 무테지우스와 반대로 시대양식은 규격화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고주장하였다. 이미 만들어진 양식에 의한 규격화는 가능하나 그 역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 데 벨데와 무테지우스의 형태 논쟁은 격렬한 대립으로 치달았으나, 이러한논의를 통해 고유한 형태와 품질을 강조한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성과로 디자인은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는 제품을 선택할 때 무의식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디자인을 염두에두며, 기업들 좋은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근저에 깔고 있다.
독일디자인연맹은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점차 변화한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 중 반 데 벨데는 적국인 벨기에인이기에 추방된다.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는 반 데 벨데가설립한 바이마르 공예학교를 계승한 바우하우스(Bauhaus)를 세운다.1927년, 독일디자인연맹은 슈투트가르트에 바이센호프 주택단지를 설계한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디자인연맹이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시도하고자 하는 시대정신을 추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존에 부재했던 것을 뛰어넘어 좋은 형태의 디자인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 이를통해 그들을 계몽하는 것이 디자인연맹의 기저가 되는 가치였다. 그러나 나치 정권과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디자인연맹은 그 시대정신을 잃고 만다.
현재, 디자인연맹은‘생산’에서 ‘소비’에 대한 문제에 대해 제기하며, 계몽단체에서 활동단체로 탈바꿈 중이다. 21세기의 중요한 과제인 환경을 주제로 삼아, 형태에 대한 논쟁에서벗어나 올바른 디자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마 우리는 디자인연맹과 같은 집단 지성이 군중을계몽하는 장면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어쩌면 21세기에그러한 장면은 상당히 구시대적이라 느껴지며 누군가는 엘리트주의에 젖은 지성인들의 오만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디자인연맹의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혁신’과 ‘계몽’이라는 이상을 좇아 끈끈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당대 어려운 시대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피상적으로 모습만 바뀌었을 뿐 정신만은 온전히 남아 아직까지도 디자인의 모태로 남아있다.
아트렉처 에디터_조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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