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트렉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렉처 ARTLECTURE Nov 12. 2018

노동과 역사

1.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


누가 그토록 여러 번


그 도시를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케사르같은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흔히도 노래되는 비쟌틴에는


비쟌틴 주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 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해냈던가?


케사르는 갈리아를 쳐부셨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페 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던가?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 또 누가 승리했던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승리의 향연을 위해 누가 요리했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인이 나온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


그렇게 많은 의문들.




베르톨트 브레히트_어느책읽는 노동자의 의문



[시인이자 희곡작가인 브르톨트 브레히트]



2.


우리는 항상 누군가의 노동 위에 서 있다


누군가의 노동 위에 앉아 있다


조금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지금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노동을 거친 것이고


누군가의 땀이 베어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우리 스스로의 땀으로


얻어낸 것이 없다



인간은 처음부터 겸손하게 태어나고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


타자가 없이는 나는 존재할 수 없고


삶을 유지할 수도 없다


인간의 기쁨은 항상 이러한 존재의 연결이


최대가 될수록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를 더 가졌다고 기뻐하는 것은


사실 더 가지는 것들의 노동을


자신이 소유했다고 하는 것의


다름 아닌 표현이다


노동이 중요한게 아니라 다른이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인생의 의미가, 진리가 있다


_민네이션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마루를 깎는 사람들]



3.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땀흘리면서


삶을 걸어가고


역사를 만들어 간다


노동 위에 오늘도 이 글을 쓰고 있다




4.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그림은 닮은 곳이 많다. 사실주의 색체와 표현도 그렇지만 무엇인가를 다루는 구도는 항상 직각과 직각이 만나고, 곡선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래서 항상 그들의 그림과 글을 읽을 때면 조용히 숨죽이게 되고,어떤 뾰족한 지점에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어느지점에서 해방감을 느끼게 될지, 어떤 시간에 해결의 시간을 가져올지를 기대하게 된다. 노동과 역사가 그렇다. 노동은 항상 인류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기에서부터 마르크스가 열을 내면서 기계제 공장제도의 역설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가 여기서 고민하는 인공지능까지. 누군가의 노동에 우리는 기대어서 살고 있다.


예술가들의 일은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 구조와 국가에 갖혀버린 자유로운 영혼을 구출해 내는 것이 아닐까? 역사가 그대로 흘러갈꺼야라는 어떤 매너리즘의 틈바구니로 노동의 시간들이 틈틈히 들어온다. 어제와는 다른 노동의 땀냄새가 계속해서 아우성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혁명을 맞이하기도 한다. 인간이 자연과 만나서 노동한 결과로 토산물을 얻지만, 인간이 작업을 통해서 얻은 도구로 우리는 인공문을 얻기도 한다. 그 사이에 우리는 행위를 하면서 자연과 작업을 왔다 갔다 한다. 지나다가다 문득 지나가는 폐지니어카의 할머니들의 주름 속에서 노동의 신성함은 사라지고, 부동산 집값이 1년에 몇억식 올라서 모두 '갭투자'를 한다는 소리에 노동의 필요성도 사라지는 것 같은 요즘. 역사속에서 노동은 어떻게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했는가? 




[카유보트의 The Pont to Europe]



5. 


시적 언어와 회화적 언어는 같은 상징을 사용한다. 기존의 상징체계에 갖혀진 단일한 해석을 해방시키는 임무라는 목적때문에 기존의 해석을 비틀기, 뭉개기, 쪼개기를 반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삶은 때론 즐겁게, 때론 무료하게 해석되면서도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예견하는 메시아적 기호로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카유보트와 브르톨트의 그림과 글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현실을 비틀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과 해석을 던져 주는 일들. 보는 것과 읽는 것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아닐까? 역사의 어느지점에서 새로운 노동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아닐까?




6.


노동과 사랑을 연결해야 한다. 어떤 이라도 노동자체로만 즐거워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노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돌이켜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사랑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노동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위한 사랑이라도 혹은 생명을 위한 사랑이라도. 먼 훗날 역사의 한 장면에서 누군가가 카유보트의 그림을 꺼내 놓을 때, 혹은 지금 어떤 영감으로 그려낸 노동과 역사가 묻어있는 당신의 이름을 꺼내 놓을 때 물어보겠지, 왜 사람들은 그렇게 노동을 했나요?라고. 그럼 우리는 삶의 치열함과 옹졸함의 결과로'라고가 아니라 사랑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그렇게 노동의 역사를 그어갔노라고. 






아트렉처 에디터_민네이션


Artlecture.com

Create Art Project/Study & Discover New !

https://artlecture.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