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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Mar 19. 2020

예술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하여

나치즘의 퇴폐 미술전.

https://artlecture.com/article/1512



인류는 삶을 살아가며 80%정도 전쟁을 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전쟁은 언제나 참혹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자초했던 전쟁 중 제2차 세계 대전에 일어난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은 매체를 통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독일 군과 프랑스 군이 한창 전쟁을 하고 있던 당시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참호(깊이 1m가 조금 넘는 구덩이)를 파지 않고 그냥 벌판에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서로가 많은 무고한 죽음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적을 피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바로 '참호'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군인들은 가족의 품이 그리웠고 평화가 그리웠다. 해 질 녘 어디선가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다. 바로 독일 군 장병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잠시 후 프랑스 군들도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던 참호에서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나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각자의 가족사진을 서로에게 보여주었고, 축구 경기까지 했다고 한다. 비록 독일이 3:2로 이기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오프사이드였기 때문에 결국 승리는 각자의 것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영화와 소설로도 많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다음 날부터는 다시 적으로 돌아간 그들!



<퇴폐 미술전의 모습>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당은 세계의 중심이 독일이라는 사상 아래 파시즘의 영향으로 국수주의적이며 조직적인 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나치는 절대복종과 맹목적인 신뢰를 당 요원들과 일반 대중에게 전달, 지시하였다. 원래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시대의 악마였던 히틀러가 직접 그린 그림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으니 말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수채화>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은 후부터 나치당의 선전부장이었던 괴뵐스(J. Gobbels)가 주축이 되어 문학을 시작으로 문화 예술분야의 전체 검열이 시작되었다. 이후 미술계에도 이러한 영향을 받게 되며 자신들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베를린이나 뮌헨의 미술대학 교수와 예술가들을 추방하거나 해임하였으며, 그들의 저서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당시 나치당의 선동을 받은 나치 학생들은 1933년 5월 서적 화형식을 거행하였다. 이 서적 중에는 아인슈타인이나 마르크스의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서적 화형식은 베를린의 바벨광장에서 이루어 졌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 미술관에 소장된 현대미술 작품들을 대거 몰수하였다. 이로써 바로 나치당이 추구하였던 독일 미술 검열의 시작된 것이다. 이후 히틀러는 1937년 국가사회주의의 독일은 '독일 미술'을 원한다고 강조하면서 서양 문화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미술을 가장 순수한 미술의 모범으로 보았고, 중세 독일의 정신세계를 하나의 이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나치당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만을 최고의 그림으로 인정하였으며, 개인의 사상과 이념이나 철학이 들어간 작품은 모두 '퇴폐 미술'로 간주하였다. 당시 퇴폐 미술가 속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키르히너', '에밀 놀데', '뒤러', '칸딘스키', '파울 클레', '고흐', '샤갈', '마티스', '피카소'등의 수많은 세계 거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 빈 예술대에 입학하기를 원했던 히틀러는 특히 케테 콜비츠와 유대인이었던 샤갈 등을 더욱 탄압하였다. 나치당은 퇴폐 미술을 비판하며 자신들이 지향하는 독일 미술의 순수주의를 직접 보여주기 위해 1937년 7월 뮌헨에 건립한 <독일 미술의 전당> 준공식을 맞추어 '위대한 독일 미술전 The Great Germen Art Exhibition'을 개최하였다.



<씨뿌리는 사람/오스카 마틴/oil on canvas/1937>, <칼렌베르크의 농부/아돌프 비쎌/oil on canvas/1939>


<4대요소-물,불,흙,공기/아돌프 치글러/oil on canvas>



<씨 뿌리는 사람>은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독일 농부가 마치 거인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독일 농부와 일반인들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함이며 독일이라는 씨를 세계에 뿌리며 그 씨앗을 내릴 땅의 소중함?을 표현한 것이다. <칼렌베르크의 농부가족>에서는 단란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 속에서 남편은 가장으로써, 아내는 어머니로써 표현하였으며 독일의 아이들은 후세에 전 세계를 지배할 주인공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훈련, 훈육, 명예 등의 개념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작품인 <4대 요소>는 히틀러가 가장 사랑했던 애장품 중 하나로 알려진 작품이다. 이 그림은 히틀러의 총통 관저에 걸려 있었으며 나치의 인종주의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치는 구릿빛 피부의 조각상 같은 남자(그리스 조각상과 같은) 그리고 우윳빛 피부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자 등을 통해 건강하고 이상적인 육체를 가진 독일인을 창조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퇴폐미술전을 관람하는 사람들/모자를 쓰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괴뵐스와 히틀러의 모습>



뮌헨에서 전시된 독일 미술전 앞에는 독일 미술전의 전시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미술관 앞의 작고 허름한 낡은 2층 건물에 '퇴폐 미술전 Entartete Kunst'을 동시에 개최하였다. 관람객들은 낡고 좁은 계단을 통해 작품을 보아야 했으며, 1층은 종교 모독, 2층은 유대인 작가 작품, 3층에는 독일 여성과 군인 그리고 농부를 모독하는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특히 나치당은 3층의 모더니즘 작품을 공개적으로 탄압했었다. 작품은 우리가 지금도 알고 있는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지난 번 소개 하였던 ‘에밀 놀데’의 작품은 1052점이나 전시되었으며, ‘키르히너’의 작품은 639점이나 전시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작품의 전시형태는 조금의 공간도 없이 그림을 다닥다닥 붙여 놓고, 곳곳에 낙서를 하였다. 이는 대중의 혐오감과 증오심을 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둡고 좁은 공간 그리고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표어 등을 배치함으로써 대중에게 일반 예술을 멀어지게 하려는 야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독일 미술전'과 '퇴폐 미술전'에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위대한 독일 미술전'에서는 전통의 아카데믹한 고전주의와 자연의 모방에 충실한 사실주의를 통해 생물학적으로 우수하고 진화된 인간상을 표현함으로써 순수한 독일 혈통을 강조한 반면, '퇴폐 미술전'에서는 고전적 규범에서 벗어난 왜곡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종족에 대한 가시적 이미지를 보여주며 유대인의 속성을 규정하고자 했다.



<퇴폐미술전 전시작품 보관소 및 작품 분류작업모습>



퇴폐 미술전을 성공적? 으로 마친 후 히틀러와 괴뵐스는 전시되었던 작품을 모두 소각하거나 조각 같은 경우 파괴하라고 지시 하였다. 작품들 중 4천여 점은 소각이 되었으며, 일부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스위스 루체른 미술품 경매시장에 보내졌다. 그러나 당시 퇴폐 미술전을 담당하고 있던 책임자는 남아있는 작품들은 소각하지 않고 뮌헨의 한 낡은 아파트에 보관하였다. 이후 그는 죽기 전 퇴폐 미술전에 전시되었던 위대한 현대미술작품의 소재지를 알렸다. 작품은 1400여 점에 이르렀으며 이는 당시 추정가로1조 4천억 원에 달하는 금액의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후 작품들은 원작에 대한 논란에 휩싸이며 원작자에게 돌아가기도 하였고 독일 정부와 유대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예술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일식/게오르게 그로스/210cmx184cm/oil on canvas/1926/헥셔미술관,뉴욕>  <게오르게 그로스 George Grosz 1893-1959>



당시 나치당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떠나 뉴욕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게오르게 그로스’는 1938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1959년 자신의 조국인 독일로 돌아왔으나 몇 달 뒤 사망하였던 화가이다. 그로스는 <일식 The Eclipse of the sun>에서 머리가 없는 남자들(사회지도층)이 군인들과 회의를 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과 같이 전쟁을 일으킨 사회지도층과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히틀러와 나치당을 그림을 통해 군국주의를 신랄하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나치당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작품은 모두 몰수 되었으며 퇴폐 미술전에 전시 되었던 그의 작품은 소각해 버렸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미술이란 그저 단순히 마음을 정화하거나 화가에게는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고리타분한 사고가 되어 버렸다. 예술 속의 한 분야인 미술은 정치적으로 계몽, 선동, 선전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 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 역사 속에 남아있는 ‘퇴폐 미술전’은 바로 예술의 역기능과 순기능을 볼 수 있는 가장 보기 좋은 예이다. 우리가 예술의 역기능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문화와 예술을 제대로 읽고 보고 느낄 수 있는 시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사고를 더욱 확장시켜줄 것이며,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불협한 행동들을 제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이렇게 예술은 우리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예술이 가지고 있는 역기능이 아닌 순기능만을 통해 넓게는 세계, 작게는 나의 삶 속에서 유연한 사고와 확장된 시안 그리고 삶이 풍요롭기를 오늘도 소망해 본다.




글 아트렉처 에디터_C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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