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우 초이닝 도르지, 교실 안의 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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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적인 고귀한 빛의 발산은 과학, 문학, 예술, 교육에서 나온다. 인간들을 만들어라. 인간들을 만들어라. 그들이 그대를 따습게 해 주도록 그들에게 빛을 줘라." -빅토르 위고-
우리에게 <패왕별희>로 유명한 중국의 천카이거 감독, 본 작품을 통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긴 했지만, 그 이전부터 천카이거는 중국 5세대 감독으로서 국제 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패왕별희>이전에 그가 연출한 <황토지>나 <현 위의 인생>은 <패왕별희>못지않은, 오히려 전원의 풍경을 수려하게 담아낸 미장센과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조명한 인민의 삶,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여파를 미시적으로 파고드는 주제의식에 있어선 더욱 높게 평가를 받곤 하는 작품들이다. 본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려고 하는 <아이들의 왕>도 마찬가지다. 문화대혁명 시기 농촌과 소수민족들을 향한 계몽 내지는 세뇌를 아이들을 교육하는 선생의 시선에서 굽어본 작품으로, 오히려 작금에 친정부적 태도를 보이는 천카이거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아주 낯선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천카이거는 본 작품을 통해서 인민들을 획일화시키는 교육의 형태에 대해 경각심을 품고 비판하며, 오히려 진정한 교육이란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자유롭게 주장하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잠재력을 일깨우는 자극임을 역설한다. 그는 이 같은 당국의 커리큘럼보다 비관습적이고 규정되지 않은 전원마을의 풍경과 삶의 형태를 예찬하며, 그 험준한 자연에서 투쟁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숭고한 롱 숏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이 같은 비관습적인 교육과 뛰어난 예술의 탄생이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한데 얽혀 주장하였다. 이 같은 본 작품의 내러티브 자체는 대단히 직관적이고 단순화되어 있지만 이를 상징적인 풍경과, 내면, 심리와 같은 비가시적인 영역을 가시화하는 신묘한 표현주의적 연출을 통해 '이미지'로서 영화의 매력을 여실히 선보였다. 무엇보다 이 같은 교육에서 피어나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예술혼은 천카이거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론을 천명한 것과도 같았는데, 지금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다소 안타깝게 느껴지는 구석이다.
즉 천카이거의 <아이들의 왕>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전원, 소수민족들을 향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를 담아낸 영화이다. 하지만 ‘계몽’이란 이름으로 이뤄진 교육의 형태가 개개인들의 개성을 말살시키고 짓밟은 폭력의 교육은 아니었는지, 오히려 진정한 교육이란 자유롭게 샘솟는 예술혼과도 같은 것임을 연출을 통해 몸소 보여준 영화였다. 이 같은 <아이들의 왕>을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본 글에서 다룰 <교실 안의 야크>와 이러한 테마, 주제의식이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 전원의 대립이 포착되고,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천연의 자연에서 이뤄지는 <교실 안의 야크>속 교육이 자연스레 천카이거의 <아이들의 왕>을 연상케 한다. 이 같은 교육을 통해 동시대의 부탄을 바라보는 작업을 본 작품을 통해 데뷔하는 파우 초이닝 도르지가 수행한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을 살펴보자. 험준한 대자연 속에 소규모의 사람들이 운집하여 살아가는 산골마을 루나나로 향한 이후의 형식은 비교적 균일하다. 하지만 루나나로 떠나기 이전 부탄의 수도인 팀부에 살고 있던 유겐을 포착함에 있어선 전원과 도시,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연출이 눈에 띈다. 유겐이 루나나로 향한 이후의 숏인지, 아니면 그가 꾼 꿈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장면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페이드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러한 꿈과 전원에 상응하는 숏에서 영화는 비교적 균일하고도 정교한 스테디캠 및 중앙 구도를 통한 온전한 연출이 눈에 띈다. 한편 꿈에서 깨어난 그의 삶을 영화는 격정적으로 흔들리는 핸드 헬드와 즉흥적이고 온전치 못한 구도로 담아낸다. 그리고 전자에서는 롱숏이 대두되어 경이로운 자연과 그 안에 놓인 사람을 함께 굽어볼 수 있었던 반면, 후자의 연출에서는 클로즈업이 강조되어 1.85:1의 화면비에 꽉 차는 인물의 얼굴이 대두되고 여기에는 여유란 없어 보인다. 이 같은 연출의 대비는 공간에 따른 영화의 주제의식과 관련이 될 텐데, 자족적인 행복이 가능한 전원의 삶을 안정적인 연출로 담아내는 반면, 만족이 불가능하고 너무도 빠르게 세태가 뒤바뀌는 도시에서의 삶을 불완전한 연출로 포착한다. 이러한 연출은 도시나 전원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다. 오히려 정글처럼 급박하게 느껴지는 공간이 바로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후 루나나로 향한 이후에 영화의 연출은 전자의 방식을 유지하며, 도시와 전원 할 것 없이 공통된 연출적 경향은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하여 소박하고 현실적인 표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도입부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던 부탄의 삶에 비한다면, 루나나로 향한 이후에는 마치 관객이 여행객이 되어서 무수한 정보들을 체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일상적이고 자연스럽던 초반부에 비한다면 작위적일 수도 있고, 마치 여행 가이드를 듣는 듯한 다소 직설적이고 투박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 같은 연출을 택한 이유는 영화의 주인공인 유겐 자신도 루나나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본 작품이 관객과 부탄의 현실을 매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국임에도 불구하고 유겐은 자국 오지의 삶에 대해서 잘 모른다. 유겐을 위시한 도시의 청년들이 전원의 삶을 잘 인지했다면, 이러한 연출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정보 전달 위주의 직설적인 연출은 자국의 수도 바깥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모르는, 부탄 내 도시와 전원의 격차를 보여준다. 이러한 영화는 부탄을 규정하는 통계라는 시뮬라크르나, 어떤 한 나라에 대해 막연히 품곤 하는 시뮬라크르를 깨뜨리는 작업을 수행한다. 정보전달 위주의 극의 방향성은 이와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부탄이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라는 것은 통계가 보여주고, 또 부탄이 대외적으로 자국을 홍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부탄인들이 행복한 것은 아니며, 또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행복을 위해서 유겐이 오지로 전근을 가야만 하는 등, ‘행복한 국가’에 의한 개인의 희생도 도드라진다. 그리고 루나나의 부탄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삶을 유지하며, 불교문화에 의거한 자족적인 삶의 태도에 의해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영위해나간다. 하지만 유겐을 위시한 도시인들의 경우 세계화의 여파로 인해 자국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하고, 또 전통적인 삶의 태도가 희석되어가며 자족에서 비롯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즉 영화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부탄에 대한 실재의 정보와 진실을 관객에게 매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시의 부탄인들이 환상을 품곤 하는 외국에 대한 이미지들이 과연 진실일까. 행복하지 않은 부탄인의 모습을 비추며 통념적인 이미지를 붕괴시키는 본 작품의 태도처럼, 영화는 유겐이 환상을 품곤 하는 호주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곤 한다. 루나나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제공하는 영화의 태도처럼, 우리는 스스로가 아는 것이 과연 어떤 통념이나 가상인지 아니면 진실인지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유겐은 어쩌면 이 같은 통념, 보편성의 희생양이다. 할머니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삶인 공무원으로서의 유겐을 기대한다. 또 유겐은 행복한 나라라는 보편성을 위한 희생양이자, 전 세계적인 보편성에 미치지 못하는 부탄의 현실에 의해 좌절하고 낙담하여 호주로 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유겐은 할머니가 기대하는 보편성이나 기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보편적인 기준에서 부탄보다 낫다고 평가되는 호주를 마냥 선망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극의 결말에서 까발려지듯 보편성은 곧 현실이 아니다. 영화 속 행복은 이 같은 보편성을 탈피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어쩌면 획일화의 물결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주체적인 자유, 예술혼을 강조하던 <아이들의 왕>과도 일맥상통하는 태도다. 루나나의 사람들은 유겐이 선생님이라는 보편적인 기대감에 미치지 못한 채 떠나가려 해도 그를 존중하고, 또 도시인에 대한 보편적인 편견은 오히려 그를 배려하는데 사용한다. 그들은 수호신을 존중하는 태도처럼 타자의 영역에 방문했을 때, 그 상대방을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취한다. 보편성을 내려놓고 각자의 타자성을 존중함에, 일련의 편견에서 벗어나 진실한 상대방의 민낯과 마주하는 것이다. 물론 그 루나나에도 강박은 스며든다. 아이들만은 도시의 기준에 맞는 교육을 받길 희망 하는 어른들의 열망이나, 도회적인 요소의 유입에 의해 삶이 파탄 난 일부 구성원들이 포착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루나나를 이루는 원리란 보편성에서 벗어난 타자성의 배려와 존중이다. 행복은 거기서 근원한다. 호주에 가서 그들의 보편적인 취향에 맞는 팝을 부르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이 부르고 싶은 야크의 노래를 부르면서 보편성에서 엇나가더라도 개인을 지켜내고 이에 자족할 수 있는 삶, 그것이 루나나라는 교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수호신의 땅에 '참여'하는 것처럼, 영화 속 주요한 것은 세계에의 참여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세계 속에 적절한 자신의 존재자를 기투하여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그 세계 속에 참여한다. 우리는 세계-내-존재로서 세계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겐은 이러한 세계를 외면하는 자였다. 이 같은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영화는 노래나 mp3플레이어로 보여준다. 유겐이 듣는 노래는 현실을 외면하는 일련의 도취제다. 장관과 마주하여 쓴 소리나 요구를 들어야 하는 현실이나 루나나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유겐은 노래를 크게 틀어, 그가 처한 현실을 외면한다. 특히 후자에서 루나나의 삶과 풍속이 담긴 민요가 차단되곤 한다. 이 같은 노래가 가상임이 밝혀지는 것은 유겐이 노래를 부를 때 현실을 환기시키는 할머니 얘기가 나오자, 갑작스럽게 노래가 끊긴다는 것이다. 노래가 곧 가상으로의 도피라면, 할머니는 그가 마주해야할 현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지속적으로 현실에의 참여, 다양한 세계로의 참여를 강조한다. 유겐이 깨어나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강조되던 상징이 바로 문이었던 것처럼, 또 루나나의 교실이나 그의 숙소에서도 열려있는 문이나 창문이 대두되는 것처럼, 일련의 열린 마음으로 세계에의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마을 주민과 마주했을 때도 mp3플레이어만을 쳐다보며 그가 처한 현실로부터 달아나고자 했지만, 서서히 그 세계의 생활양식에 적응해가기 시작한다. 루나나라는 세계로 참여함에 그가 역하게 생각했던 열매는,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도구로서 적합성을 띠게 된다. 루나나에 도시의 교실을 기대하는 것은, 본 마을에 적합지 않은 허황된 가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처음에 유겐은 이 같은 루나나의 허름한 교실을 도시라는 세계의 기준에 따라 외면해왔다면, 서서히 그 공간에 적응해가고 유용하게 바꿔나가며 세계에 참여해간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유겐이 아이들에게 루나나로 향한 야크에게 자신의 털을 모두 내어준 버팔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같은 세계에의 참여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도시에서의 삶을 담은 노래나 아니면 서구에의 예찬을 담은 노래가 아닌, 루나나의 민속이 담긴 노래를 배워가며 그 세계에 참여해간다. 그리고 이러한 노래에 의해서 내가 포기되기도 한다. 유겐은 호주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가수가 되어 바에서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노래가 아니다. 호주인들의 일상, 보편성에 스며들기 위해 강요된 노래, 이 같은 노래를 부르는 유겐은 자신이 가상이 되고 소외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유겐은 자신이 부르길 희망하고, 자신의 삶이 담긴 야크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는 우리에게서 체념의 공간이 아니다. 인간은 세계를 규정하고 만들어나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호주에서 야크의 노래를 부르는 유겐의 모습은 세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여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호주에서도 이 같은 삶의 태도는 존중받을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루나나에서처럼 말이다. 부탄의 종교는 불교가 주류이다. 영화 속에서도 윤회적인 세계관이 언급되는 것처럼, 서로가 배려 받음에 행복할 수 있는 루나나에서의 삶은 이 같은 종교적 색채로부터 기인한다. 내가 죽어서 인간이든 동식물이든, 내가 바라보는 그 상대방이 될 수 있다는 마음에 의해, 그들의 삶을 헤아려 존중하려 한다. 설산의 사자를 걱정하는 구성원들의 태도나, 야크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래는 이 같은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유겐은 이제 루나나의 구성원들을 넘어서, 늙은 야크와 공존하며 동물까지도 존중할 수 있는 태도에 이른다. 또 촌장의 부인이 요절한 것처럼, 루나나의 험준하고도 척박한 대자연에선 죽음이 친숙하다. 인간을 사소하게 만드는 영화 속 경이로운 롱숏이나, 자욱하게 피어오른 음산한 안개는 이 같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세계를 강조한다. 이렇게 죽음이 친숙하고, 타인의 떠나감이 익숙한 세계 속에서, 루나나의 주민들은 대상의 삶 그 자체만을 존중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풍요로이 내어주는 야크처럼, 자족하는 삶 이상의 것은 모두가 서로를 위해 내어줄 수 있다. 그들은 서로의 삶, 그것 자체를 넘어선 것들을 바라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를 위함에 자연스럽게 그들은 강요치 않은 군집을 이룬다. 국가가 강제적으로 루나나로의 전근을 지시했던, 강요된 공동체와 대비를 이룬다. 이렇게 영화는 루나나라는 세계나 종교적 색채를 통해 타자에 대한 관계론과 이상적 공동체의 형태를 엿본다.
그리고 영화는 교육에 대한 작품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아이들의 왕>에서의 주인공도 당국에 의해서 오지로 향하게 되고, 거기서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본 작품에서도 이 같은 과정 속에서 교육의 의미나 의의를 일깨운다. 유겐을 통해서 그들이 속한 세계에 적합하고, 그 세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주는 교육의 형태가 펼쳐진다. 루나나에 부재하는 car가 아니라, 그들의 도처에 존재하는 cow를 부탄의 공용어인 영어로 읽을 수 있는 교육을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바를 몸소 실천하는 정신도 강조된다. 단순히 착하게 살라거나 야크의 정신을 말로만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자신이 가진 전통지를 타인에게 내어주며 선한 마음을 실현하는 교육을 말이다. 그리고 교육의 의미는 루나나의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교육을 통한 성장은 유겐에게도 이뤄지는데 영화의 도입부에서 거울이 반복적으로 포착되던 것처럼, 유겐에게서의 교육이란 그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 반성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가정환경과 유사한 펨 잠을 보며, 자신의 자족과 타인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을 구별한다. 이를 통해 세계 속에 놓인 자신을 더욱 잘 통찰할 수 있게 만드는 교육의 역할을 논한다. 그리고 유겐과 관객들이 루나나의 구성원을 통해 본 공간을 알아가고 뛰어넘어 가듯, 교육을 통해 도시나 전원, 공간과 공간 간의 간극을 뛰어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자국 내에서도 몰랐던 도시와 전원 간의 격차, 단절을 극복하는 작품으로서, 기타를 이용하여 야크의 노래를 부르는 문화 간의 융화나, 양치를 배워가며 전원에서도 필요한 문명의 혜택을 수혜 받는 아이들의 태도가, 이 같은 극복을 보여준다. 끝으로는 도시와 전원을 넘어서서,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듯 보인다. 우리가 부탄에 대해 더욱 밀접히 접근하는 것처럼, 루나나에서의 삶이 호주라는 세계 속에서도 녹아들고 융화될 수 있기를 바라는 듯이 말이다.
이외에 영화는 온전한 끝을 말하지 않는다. 윤회적 태도를 시작과 끝에도 적용하여, 시작은 무언가의 끝이요, 끝은 무언가의 시작임을 역설한다. 어떤 삶이 끝나고 또 다른 삶으로 전개되는 윤회적 끝과 시작처럼 루나나로 향하는 그 시작과, 집과 호주로 향하는 그 끝을 수미상관으로 반복하여 보여준다. 마치 끝과 시작은 동일한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부탄 내 팀부나 루나나에서의 삶은 끝난 것이 아니라, 또 언젠가 돌아갈 수 있는 시작의 여지가 열려 있는 것이랴. 영화 속에서 줄곧 언급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대사나, 회귀나 돌아옴의 여지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정리하여 본 작품은 행복의 나라라는 부탄의 편견, 보편성을 넘어서서, 실재의 부탄에 대한 정보나 진실을 매개해주는 영화라 요약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본 작품을 통해 부탄 내의 도시와 전원과의 간극, 격차를 엿볼 수 있고, 또 세계 속에 적응해가는 우리네 삶과, 타인을 존중케 만드는 불교적인 삶의 태도를 배우게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행복의 근원을 목도하다. 물론 루나나의 몽환성과 현실의 리얼리즘의 교차가 대단히 강렬했던 도입부에 비한다면, 그 이후의 전개는 대단히 상투적이며, 지나치게 정보를 서술하는 영화의 전개는 다소 촌스럽다. 이러한 초반부를 제외한다면 연출의 덕은 실재 루나나의 풍경에 큰 덕을 본 셈이다. 다소 아쉬운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작품의 미덕은 분명하고, 무엇보다 중앙아시아 영화의 입지 때문에라도 감상의 명분은 충분하다. 국제 영화제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에미르 바이가진이나,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계 영화감독인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의 <아이카>도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실정이다. 부탄과 문화적으로 색채가 유사한 티베트의 삶을 비추는 것으로 유명한 페마 체덴의 작품도 거의 소개가 되고 있지 않다. 이 같이 중앙아시아의 영화들에 대한 소개가 빈약한 국내 영화계의 현실 속에서, 남아시아로 분류되긴 하지만 문화적 색채가 중앙아시아와 더욱 유사한 부탄 영화인 <교실 안의 야크>는 중앙아시아의 삶을 이해하고, 또 그것이 반영된 예술을 감상하게 만들어주는 희소한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글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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