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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Dec 03. 2018

영화 색으로 말하다.

영화 색으로 말하다


한국의 사찰은 종교적이며 역사적이기도 하지만 미적 체험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일주문에서 사찰로 향하는 길은 구도자의 길이면서 예술 작품이자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갖추게 한다.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사찰을 찾게 되는 이유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듯 사찰 길은 시간으로 설계되어 있다. 걷기 편한 평지는 빠르게 걸어도 가깝지는 않다. 경사가 있는 곳은 더딘 발걸음을 위로하듯 가깝다. 설정된 시간 동안 보여지는 길가의 풍경은 시각적으로 디자인되어 있다.사찰을 매번 찾아도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큰 나무 사이에 보이는 작은 나무나 꽃, 잡초들의 변화에 있는 것이다. 나무, 꽃, 풀들의 잎과 꽃은 조화롭게 계절에 의해 채색되어 있다.


자작나무숲,2018

https://artlecture.com/artworks/2611


유재희 작가의 “자작나무 숲”은 그 옛날 승려들의 시선을 보는 듯하다. 시간의 에너지로 채워진 자작나무의 강직함과 변화하는 자연의 색채들이 담겨 있다. 짧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수천 년 전의 승려들이 미래를 상상하며 만든 사찰 길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처럼 단조로운 색채의 길도 있다. 동백나무가 심어졌고 그 사이에 보이게 하려는 차나무가 심어졌다. 녹색의 단조로운 공간 채색의 의미는 하천에 놓인 돌다리의 의미를 알아야 해석된다. 아홉 개였던 것이 지금은 여섯 개만 남았지만 여전히 다른 사찰에 비해 많은 수의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는 하천을 건너기 위해 놓는 것이지만 이곳 대흥사의 다리들은 다른 기능과 메시지를 위한 것이다.


대흥사 다리


"물이 멈추고 사람이 흐르네" 선종 승려들은 하천의 다리를 이렇게 말한다. 물은 멈춰 현상에서 형상이 되고 사람은 형상에서 현상으로 변한다. 물은 관찰의 대상에서 관찰자가 되고 관찰자였던 사람은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푸르름을 찬탄하기도 하지만 당시 승려들의 의도는 단조롭게 채색한 동백을 보며 감흥에 취하라는 것이 아니며 멈춰진 하천의 물을 감상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시선을 향하게 하려는 것이다. 감정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분노, 욕망, 시기, 미움이 가득 담기지는 않았는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며 대흥사로 가는 길은 내면의 균형을 회복시키기 위한 길이다. 내면이 아닌 삶의 균형이 문제라면 사찰 경내로 향할 수밖에 없다.


대흥사 산신각 내부


본존불이 모셔진 대광전이 종교적 깨달음과 영혼의 치유를 위한 곳이라면 산신각은 구체적인 삶의 구원을 위한 곳이다. 호환과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산신과 자녀들의 병치레와 가난을 벗어나게 해준다는 칠성신, 일상의 행운과 복을 준다는 나반존자가 모셔지는 곳이 산신각이다. 대흥사 산신각에는 남인도에서 홀로 득도했다는 좌측의 나반존자와 우측의 산신 탱화가 걸려있다.


좌측의 소나무와 국화, 우측의 연꽃과 목련


대흥사가 유명해진 이유는 다도를 중흥시킨 초의 선사 때문이다. 다도로 이름이 높기는 하지만 그림도 많이 그렸다. 육체의 고통인 위장병을 차를 통해서 해소했다면 마음의 고통은 그림을 통해서였다. 어떤 그림이 초의선사(草衣, 1786~1866)의 그림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산신각에 걸려있는 그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림은 자연의 균형을 보여준다. 수신을 상징하는 천장 좌측의 청룡과 불의 신을 상징하는 우측의 적룡이 그려졌고 그 아래에는 계절을 상징하는 나무와 연꽃이 나열 되어있다. 청룡 아래에는 대지가 있고 적룡 아래에는 물이 있어 땅에는 비가 내리고 불은 물을 만나 곡식과 음식을 익게 한다. 자연의 균형을 통해서 삶의 안정을 이루는 것이 옛사람들의 염원이었다. 한국인에게 너무 익숙한 태극기의 이미지다. 지금은 국가의 상징인 국기로 사용되고 있지만 옛사람들에게는 삶의 이상적 공간 이미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몬드리안 (구글 이미지)


기도를 통해서 희망의 불씨로 마음을 밝혔다면 돌아갈 차례다. 먼 길을 오느라 지친 몸을 쉬게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반전이 숨어있다. 돌아갈 에너지를 모으느라 건물의 기단이나 계단에 앉아 쉬면서 사찰 밖 삶의 공간을 바라보게 된다. 사찰이 제공하는 시선은 안정감이다. 삶이 구현되는 공간은 산신각 내부의 자연의 균형처럼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 그 시선이 디자인된 곳은 본존불을 모신 대광전에 있다. 불교 신자가 아니라서 산신각에만 들러 가려던 사람도 가장 편안한 시선이 있는 대광전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다. (선종사찰인 대흥사는 속세를 보지 못하게 한다.)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 가는 것. 삶의 문제도 내면의 문제라고 말한다. 다시 다리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사찰은 현실과 상징을 결합해 영혼의 균형을 찾아준다. 예술이 그렇듯 한국 전통예술도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는 것 너머까지 보이게 구현했다.




색으로 질문하다. 사탄의 태양 아래서



일반인들은 종교 공간을 잠시 찾아가 영혼의 치유를 얻고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곳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의 삶은 어떨까.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1987년 작품 "사탄의 태양 아래서"는 종교인의 삶을 다룬다. 대흥사 산신각 내부를 태극기의 상징으로 공간화와 시각화를 했던 것처럼 “사탄의 태양 아래서”는 프랑스의 국기로 공간화와 시각화했다. 색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에 관해 관객에게 질문 형식으로 내용을 채웠다. 




제한된 자유


도니상 신부와 소녀 무셰트는 회화적인 색을 입혔다. 고뇌하는 도니상 신부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승려” 그림의 색이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해변의 승려


푸르름으로 가득한 해변에 한 승려가 서 있다. 머리맡에서 시작되는 광활한 하늘은 짙푸른 해변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승려의 내면을 그린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공간에 희망이나 절망도 없이 승려는 자신의 내면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종교인에게 있어서 자유는 종교적 신념의 테두리 안에서의 제한적 자유다. 그 안이 좁아 보이지는 않는다. 속세의 이념 공간보다 더 광활하게 그려낸 해변의 승려처럼 도니상 신부를 통해서 종교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당신들은 얼마만큼 자유로운 영혼의 공간을 가졌는가?"이다.


모리스 피알라 감독이 도니상 신부에게 해변의 승려의 색을 입힌 것은 영혼의 구원이 필요로 했던 원작자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삶의 시대적 배경 때문이기도 하다. 이성이 종교를 대신해 인류의 구원자처럼 등장했지만 파멸로 몰아넣었던 19세기 후반. 각각의 주의(主義)들이 개인을 속박하려던 시대에 내면의 자유를 추구하던 당대의 요구를 색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여진다. 




평등, 순수를 죽이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앗시리아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던 전투에서 남편을 잃은 유디트는 앗시리아군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찾아간다. 미모에 반한 홀로페르네스는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초대하지만 유디트는 한 노파와 함께 그를 죽인다.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색의 옷을 입은 유디트가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어느 누가 살인의 순간에서 아름다움만을 뽑아낼 수 있는가? 하지만 노파의 추한 얼굴을 유디트 가까이 배치해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게 한다. 유디트의 손에 쥐어진 칼이 홀로페르네스의 육체를 파괴한다면 유디트와 노파와의 대비는 인간의 내면을 혼란에 빠뜨리는 잔혹함이다. 유디트는 앗시라군의 막사를 빠져나가 예루살렘 군에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건넨다. 예루살렘으로 진격한 앗시리아군은 그들의 장군 목이 성에 걸려있자 후퇴한다. 유디트는 앗시리아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킨 영웅인가 혹은 한 남자를 죽인 악녀인가. 그녀는 루터에 의해 성경에서 추방당한다.


루터에게 있어 남편의 복수와 이스라엘을 지킨 유디트의 성경에서의 추방은 당연한 것이었다.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이상적이라 생각이었던 루터는 이 여성 영웅은 불필요했다. 사회 밖으로 내보내야 할 것이었다. 복수의 완성은 살인으로, 다른 남자의 침실로 찾아간 것은 불경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루터에게 유디트는 순수함을 잃은 여성일 뿐이었다.  

무셰트의 여린 감성과 아름다운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그녀의 행적과 행위를 통해서 순수함은 사라진다. 순수함이 사라지면서 무셰트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평등적 시선도 사라진다. 무셰트의 감각적 순수함을 추방한 것은 루터만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녀가 순수하게 보이는가?


어린아이는 하루 종일 손으로 쥐어도 손이 굳어지지 않으니 자연의 덕과 합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종일 보아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으니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도 할 일을 알지 못하며, 자연적인 사물에만 순응해서 자연의 물결과 같이하여 살아가는 것이니 이것이 위생衛生(생명을 지키다)의 헤아림이다.  -장자 잡편 경상초-

 

순수함은 철 모르던 시절의 어리석음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순수함은 우리 일상을 떠나 종교에서 유지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물욕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종교에 순수함만을 바라는 시대는 끝났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다른 작품인 "어느 시골 신부의 이야기"에서도 사제의 고민은 그것이었다. 순수함은 종교에 은폐시키고 영혼과 육체의 치유와 물욕적 구원까지 요구하는 시대에서 종교인이 된다는 것에 관한 고민이다. 


영화장면


도니상 신부가 버려야 하는 것은 감각의 즐거움이다. 그는 매일 신앙이 약해지는 것이 두려워 자학한다. 감각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신에게 다가간다는 생각이다. 무셰트가 따르던 것은 육체적 감각의 즐거움이다. 인간은 이 둘 사이의 간극에서 멀어져 어느 한 중앙에 자리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평범함이다. 도니상 신부와 무셰트가 평범함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평범함이 욕망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평등을 통해서 평범함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함을 통해서 평등이 시작된다. 국지적으로 제한된 곳에서의 평등을 말하면서 인류적, 지구적 평등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위선이다. 국가, 민족, 종교, 인종이라는 국지적인 평범함에 의한 평등들이 충돌하고 대립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장자는 그래서 평범함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평등의 영역이 아니라 아이의 순수함이 만들어낸 평범함으로 확장시켜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애, 영혼이 치유되는 것처럼.


영화장면 중


순수함이 잠들었다. 그는 더 이상 신앙생활로 영혼 치유와 기적을 행할 수 없다. 세상의 요구들을 거부하고 죽음이라는 영원한 잠으로 구원한다. 우리는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매일 자신을 구원하고 있다. 도니상 신부가 구원받는 것처럼.


멍든 밤, 2016

공허함에 짓눌려 멍이 들어요나 홀로라는 사실에견딜 수 없는 밤을 지새웁니다-It's a bruise, crushed by emptiness.The fact that I'm aloneI've been up all night

https://artlecture.com/collection/218



우리 몸이 음식물을 소화시킨다면


밤은 삶을 소화시킨다

다른 사람에게는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을 자기 자신에게 쉽게 노출시킨다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 어루만지고 달래며 위로한다

소화시키기 어려울 것 같은 분노

절망도 소화해낸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순수함이 갖는 힘이다

.

최 힘찬 작가의 멍든 밤은 영혼의 치유과정을 보여준다. 상처는 망각이라는 어둠으로, 희망은 밝음으로 되살린다. 치유된 영혼은 확장되어 하늘과 조우하려 한다. 박애는 치유의 손길처럼 조금씩 확장되어야 한다. 제한적인 자유와 평등의 삶 속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그 안에서 상처받은 영혼이 어떻게 치유하는지를 보여주며, 박애는 영혼의 치유와 같다는 것을 말하는 “사탄의 태양 아래서” 였다.





아트렉처 에디터_꼭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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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tlec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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