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개념미술
전작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작품 자체로서만 이해되어야 작품의 개별 창조성이 획득된다. 이해되지 않는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작前作을 통해 작가의 성향과 작품의 맥락을 연결해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이해의 범주 안에서 새로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감독의 묘비에나 어울릴 만한 일일 뿐이다. 보편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는 사회 관습적인 결과로써 탄생하는 것은 이해의 허상이자 자기기만이 이루어지는 심리 과정일 뿐이다. 영화나 예술의 평가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이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생산해 내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사회관습적으로 허용되어 온 허구적 개념들이 구축되는 과정을 드러나게 하는 작업을 해온 작가들을 개념미술가라 할 것이다.
도토리 나무, 크레이그 마틴, 구글 펌
크레이그 마틴의 "도토리나무"라는 작품이다. 아래에는 작품에 관한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된 텍스트가 걸려있다. 크레이그 마틴은 물 잔을 색, 무게, 크기, 느낌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들의 변화 없이 물리적으로 도토리나무로 변화시켰다고 한다. 여기에 관람자의 두 가지 심리 반응을 이끌어 내고 느끼게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편한 심기를 갖을지 모른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이해의 영역으로 흡수하기 위해 철학을 가져와 물 잔을 도토리나무가 되게 한다. "도토리나무"라는 작품을 통해서 관람자가 도토리나무가 되게 하거나 거부하는 심리적 과정을 보여주는 개념 미술처럼 영화도 관객이 자신들의 내면을 만나게 하기도 한다. 2017년 칸 영화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린 램지 감독의 "너는 정말 여기에 없었다(원제 you were never really here)"가 그럴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타인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이해라기보다는 이해라는 욕구가 만들어낸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한 남자와 소녀의 의식 탄생 과정을 보여주면서 관객의 내면화된 '이해'라는 의식적 욕망의 허구성과 만나게 한다. 예를 들어, 전작인 "케빈에 대하여"가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보여줬다면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관객의 내면을 보게 한다는 점에서 전작과 확연히 구분되는, 개별 창조성이 획득된 영화라 할 수 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개별 창조성을 위해 린 램지 감독이 사용한 것은 개념 미술이다.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이 완성되게 하는 개념미술과 같이 영화는 시각적 목격뿐만 아니라 심리적 참여를 유도한다.
스토리와 제목
한 남자가 소녀를 구해낸다는 간단한 이야기다. 액션 스릴러 영화로 보이게 하기 위해 해결사, 청부업자, 킬러라는 제목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주인공이 가지고 다니며 살인을 저지르는 범행도구인 망치를 제목으로도 할 수 있다. 제목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영화 배급사는 그럴 의도가 있었음을 포스터를 보면 알 수 있다. 제목을 바꿨더라면 간단한 줄거리를 관객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정말 여기에 없었다"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스토리가 비본질적인 것이라면 제목은 영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탄생 과정
크레이그 마틴이 물 잔을 도토리나무로 만든 것처럼, 영화는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유쾌한 농담과 같이) 조류의 알이 부화하는 모습으로 의식의 재탄생 과정을 영화를 통해 보여줄 것을 암시한다. 알의 부화 과정을 보면 몸체가 완성되고 내난각막을 뚫고 나와 외난각막이 마르면 단단하게 보호하던 난각(껍질)을 뚫고 나와야 새라는 존재로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 영화상에서 주인공이 세상으로 나오려는 방향이 의식의 탄생과정이라면, 관객의 의식 과정은 그와 반대로 주인공에게 향하게 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은 숫자(탄생)의 엇갈림으로 시작된다) 간단해 보이는 이 과정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을 것이다.
몸이 호흡하는 기실이 아래로 향해 있으면 숨 막혀 죽는다. 내난각막이 찢어지지 않는다면 기실이 제공하는 공기보다 더 많은 호흡을 하는 성장한 몸체 역시 죽는다. 내난각막까지 찢어냈다 하더라도 외난각막과 부리가 적절한 온도에서 마르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뚫어내야 할 난각(껍질)은 깨지지 않는다. 외난각막이 마르고 부리가 마른 상태에서 탄생의 순간인 난각을 뚫어내는 것은 단 한 번의 두드림이다. 80%에 달 하는 에너지를 쏟아내야만 난각을 뚫어낼 수 있다. 알을 보호하던 것들이 탄생의 순간에는 생명의 위협이 된다. 새로운 시선을 통한 재인식은 알의 부화 과정과 같아서 사회 보편성으로 보호받았던 지적 결정체인 개념과 견고한 심리 방어를 뚫어내야 하는 어렵고도 위험한 작업이다. 영화는 병아리가 생명체로 탄생하며 직면하는 세 개의 난관들과 같은 과정인 내난각막, 외난각막, 그리고 난각이라는 것을 가정, 사회, 체제로 형상화하고 그것을 뚫고 나오는 모습으로 의식의 재창조 과정을 보여준다. 개념 미술이 그러하듯 린 램지도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이 보편적 관념에서 탈출해 자유로운 세계로 의식이 진입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의식이 생성 되는 곳
라이언 갠더의 작품을 보면 풍선 하나와 천으로 가려진 어떤 것이 같은 공간 안에 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짐작할 수 있는 물건으로 대상을 설정하게 된다. 풍선 안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천에 가려진 것은 무엇인가? 의자이거나 미술 화판 받침대 같기도 하다. 천 안이 풍선처럼 비어 있다면 우리의 판단은 재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라이언 갠더는 일깨워주고 있다. 관람자의 참여를 통해 작품이 완성되는 라이언 갠더의 작품처럼 관람객이 자기 손으로 천을 치워 확인하게 한다.확인되는 것은 주인공 조의 과거와 내면을 본 관객 자신들의 인식이다.
우리의 의식이 처음 만들어지는 곳은 가정이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부모의 훈육이라는 방식으로 의식의 틀을 형성하게 된다. 엄격한 훈육 안에 있던 자유로운 이용의 대상이었던 의자나 화판 받침대는 무엇보다도 친숙한 놀이 공간이자 쉼터였기에 편안하게 생각되는 대상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가정은 훈육의 공간이면서 한 없이 사랑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가정이라는 곳에서 자유와 즐거움을 제공해 줬던 친숙함은 무척이나 견고해서 우리의 일차적 판단 기준이 되는 곳이며 의식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자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주인공의 과거를 보여준다. 관객들도 조의 어린 시절 목격자가 된 셈이다. 학대를 당했던 상처의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청부업자의 삶이 이해되어야 하는지 묻는다. 현재의 삶이 과거의 보상이어야 한다거나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폭력과 살인을 이해시키려는 린 램지의 유쾌한 농담에 굴복한 관객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관객의 이해 욕구의 강력함을 일깨워준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주인공 조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을 관객들의 도덕률에 따른 판단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준다. 마음과 의식, 감정과 이성이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의식이 변하는 곳
죽은 소녀들이 입을 벌려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은 판단의 모호성을 보여준다. 상어이면서 상어가 아닌 무엇이다. 모순적인 문장으로 환원되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에는 학습에 의해 길러진 동일성의 판단을 확인하게 한다. 살아있는 모습처럼 커다랗게 입을 벌려 먹이 먹는 모습으로 죽음을 지워내 하나의 고깃덩어리는 상어로서 보이게 된다.
정육점에 소나 돼지가 있다고 하지 않는다. 생명이 죽음으로 분해되어고기로 판매된다. 죽음의 한 조각이었던 고기는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 삶의 조각으로 변용된다. 육식은 인체에 필요한 필수 영양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고된 육체노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인간이 먹을 수 있다는 사회적 경험을 통해서 죽음의 조각이 삶의 조각으로 재인식되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묘하게 사회적 경험에 의한 판단과 학습에 의한 판단을 교묘하게 뒤틀어 놓아 둘 사이는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죽음의 조각을 이어 붙이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 삶의 조각으로 변환되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저 커진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학습에 의한 동일성의 판단으로 동물로 판단할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인식은 몇몇 특징들로 살아 있는 상어와 같다고 판단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조와 관객이 목격하는 죽음으로 나뉜다. 먼저 조가 경험한 죽음을 보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호의를 베풀지만 그것을 빼앗으려 다른 아이가 발사한 총에 맞아 죽는다. FBI시절 컨테이너에 갇혀 질식해 죽은 어린 소녀들이다. 조금 더 일찍 찾아냈다면 살릴 수도 있었다. 이들의 죽음에 동일성이 달라진다. 순수한 의도였으며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며 조가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라면 인정할 수 있을까? 그들의 죽음이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근본적인 판단 이유는 체제가 전쟁과 범죄의 죽음에는 일정한 범위에서 허용한다는 것을 관객이 알기 때문이다. 체제 밖에 있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영화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을 "너는 여기에 없었다"로 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없는 부모의 심정으로 바라봐야 하겠지만 마치 그곳, 체제가 허용하는 살인의 영역에 있는 것 같은 관객들에게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다.
관객이 목격하게 되는 죽음은 부도덕한 자들의 죽음이다. 청부 중개인, 부패한 경찰, 부패한 정치인들의 죽음에 마땅히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된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관객들의 일상과 떨어진 죽음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관객 삶의 영역에서의 죽음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무신경하다. 우리의 일상이 모든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 안에서 권력욕과 성적으로 타락한 정치인의 죽음에 통쾌함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관객 자신들의 일상의 사소한 타락을 마주하게 한다는 점이다. 정치미술이 주로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의 타락과 폭력성의 어둠을 고발했다면 현재는 개인의 사소한 타락이 사회의 도덕적 맥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감지하게 한다. 감지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목격이 각자의 일상에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다.
의식의 재구성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실도 메이렐리스의 코카콜라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실도의 메시지가 새겨진 빈 콜라병은 수거되어 공장에서 다시 채우면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그녀의 메시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드러나게 된다. 실도의 작품 의도와 비슷하게 주인공 조가 다 마신 우유 컵은 가득 채워진다. 누군가 마셨는지 모를 중간의 분홍 음료(딸기주스로 보이는)와 니나가 마신 빈 컵을 설탕과 소금으로 보이는 것들이 바라보고 있다. 린 램지가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선택한 이유는 영화에서 암시적으로 제시한 개념미술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서 암시적으로 제시한 작품들은, 마르셀 뒤샹의 "샘"과 존 레이샴의 "사전의 고난", 수잔 힐러의 "목격자",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그리고 실도 메이렐리스의 "코카콜라 프로젝트"까지 일련의 개념미술 작품들이 제시되었다. 일상의 물건들을 재구성해서 예술작품으로 재 장초 할 수 있었던 것은 체제와 공동체의 가치판단에 의해 내면화된 자의식에서 개념미술이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인전이나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글과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비교해보고 그들의 삶을 모방하려 한다. 하지만 린 램지는 예술가의 삶이 아닌 부도덕한 한 남자와 자의식이 없는 어린아이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 배경에 개념미술을 넣어 예술가들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가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작가의 작품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작품 하나하나는 작가의 삶과 의식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가 역동적인 의식으로 재구성된 개별적인 것들이다. 자의식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자의식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야 한다. 자의식을 확인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영화상에서 주인공들은 만남으로서 확인하게 된다. 사회와 체제에 의해 형성된 자의식을 가진 조와 아직 자의식이 없어 옳고 그름의 판단이 없는 니나의 만남은 서로를 확인하게 한다. 이들이 처한 현실이 암울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니나의 마지막 대사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joe. let's go. it's beautiful day!"
그들을 미래로 이끄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나 도덕률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날씨다. 예술가들의 역동적인 의식처럼 주인공 조와 니나가 자의식을 재구성하고 세상으로 확장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예술
충청북도 보은군 법주사에는 조선시대 선종 승려였던 벽암 각성(1575 - 1660년)이 사찰을 중건 하면서 가져다 놓은 철제 솥단지 하나가 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사찰을 중건하면서 인부들을 먹일 밥을 지었던 솥이라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솥으로 밥을 하는 것에는 단지 보다는 솥 뚜껑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끓는 물의 압력을 견뎌내야 할 정도의 무거운 솥 뚜껑이 있어야 하지만, 없다. 벽암 각성이 이 솥단지를 가져다 놓은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 된다.
선종의 승려들은 문자를 통한 부처의 가르침보다는 개인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승려들이 깨달음을 얻는 방식은 개념미술과 비슷하게 일상의 것들을 재인식하는 방식이었다. 돌멩이 하나를 대나무에 던졌는데 돌멩이가 대나무와 부딪힌 소리에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누군가와의 우연한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지혜를 얻기도 하며, 때로는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진리라는 것을 찾는 논증 방식을 얻기도 했다. 또한 대선사가 설법을 할 때에도 짚신, 지팡이, 빗자루, 모자, 옷, 생활 물건들을 철학적 사유를 통해 가르침을 전해줬다. 선사들의 가르침 연장선에서 보자면 이 항아리를 통해서 벽암은 두 가지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한 승려가 물었다.
"세계가 이렇게 뜨거운데(고통스러운데) 어느 곳으로 피해야 하겠습니까?"
스승이 말했다.
"펄펄 끓는 가마솥과 이글이글 불타는 화로 속으로 피하거라!"
승려가 물었다
"그런데 펄펄 끓는 가마솥과 이글이글 불타는 화로 속으로어떻게(무슨 이유로) 피하겠습니까?"
스승이 답했다
"온갖 고통이 이를 수 없다!"
또 선사들 전하는 말에는 "공空한 것을 깨닫게 되면 솥단지의 밑 그을음에서 불꽃이 튄다"라고 한다. 선수행을통해서 경전의 진정한 가르침도 깨우치게 된다는 의미다. 솥단지는두 가지로 해석된다. 선조 5년에 태어난 벽암은 임진왜란이라는 민중의 전쟁의 고통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탄압받던 승려들이 승병을 일으켜 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경전이 밑 바탕이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마음의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후대 종교인의 수행과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기도 하다. 민중의 고통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벽암의 시대에는 전쟁이었지만 시대마다 사람들은 다른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개념미술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가마솥과 화로 속으로(고통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의식의 변용 가능한 재창조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가 된 것이다.
개념미술이 관람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듯이, 개념미술가들과 벽암 각성이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일상의 물건으로 관찰자들의 의식 참여를 유도하고 재인식과 개념의 재설정을 통해 삶의 옳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린 램지 감독 또한 영화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삶은 예술을 모방하지 않는다. 나쁜 텔레비전을 모방할 뿐이다."
현재 우리 삶을 보자면 어느 정도 긍정되는 우디 앨런의 말을 반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린 램지 감독은 개념미술을 통해 정치사회적인 영화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정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며 관객들에게 고상한 계몽주의적 언사를 남발하지 않아도 되기에 개념미술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술의 한 기능, 관람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예술적 인식의 지평을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영화를 통해서 관객에게 제시한 것이다.
- 모든 영화관련 글들이 그렇듯, 감독의 전작이나 감독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 한 편에 담긴 것들만 보고 있습니다. 감독의 정확한 의도가 아닌 주관적인 해석임을 밝힙니다. -
아트렉처 에디터_꼭그래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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