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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Mar 19. 2021

낙서를 닮은,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사이 톰블리 Cy Twombly (1928-2011)


 내가 나를 정확히 아는데, 부족한 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강의를 맡기는 대학들이 있다.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강단에서 예술사회학의 테두리에 걸친 분야들을 가르친다. 가장 원론격인 사회학의 이해부터 미학, 조형론, 음악학, 문화정책, 그리고 사회통계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제를 산만하게 건드린다. 내용은 다르지만 일관된 점은 재미없는 강의, 그리고 필기시험을 치른다는 점이다. 학점관리가 중요해진 요즘, 시험에는 온갖 부정행위가 동원된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전적이며 많이 보급된 커닝 방법은 책상에 몰래 쓰는 메모다.


 시험 당일, 사회학 강의실 책상에는 안소니 기든스, 울리히 벡, 니클라스 루만 같은 사람의 이름이 꼼꼼히 적혀있고, 통계학 시험장에는 표준편차를 구하기 위한 분산(N빼기 1분의 시그마 괄호 열고 X빼기 평균값 괄호 닫고 제곱...) 공식이 쓰여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암호처럼 되어있다. 난 이런 현장을 잡아낼 때마다 화가 버럭 나기보다는 애처롭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가끔씩 그 일탈의 필기체는 아름답게 보인다. 훗날 우리 후손들이나 외계인이 이 지식의 보고를 발견한다면 과연 어떤 해석을 할지 궁금하다.


Cy Twombly, Academy, 1955. 이미지 출처 | Wikiart


 미국 화가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그림에는 커닝 문건처럼 남들이 알아보기 힘든 형상이 가득 차 있다. 뭔가를 뜻하는 건 분명한데 뭔 뜻인지 모르겠다. 그의 작품을 그래피티(graffiti)아트라고 부를 순 없지만 낙서를 닮은 건 맞다. 기본적인 요소는 선이다. 낙서 하는데 색칠도 하고 명암도 넣는 잉여력은 좀처럼 발휘되기 어렵지 않나. 톰블리는 자신의 그림이 고대 신화와 같은 서사적인 텍스트를 암호처럼 바꾼 것이라고 했다. 내 눈에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가까운 그 그림들은 색감과 즉흥성 때문에 지극히 매력 있어 보인다. 그런데, 다 좋은데 그냥 있어 보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Cy Twombly, Leda and the Swan, 1962. 이미지 출처 | Wikiart


 톰블리는 1950년대 초에 남부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할 기회를 얻고 그곳 문화에 빠져들었다. 이어서 그는 암호해독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결과로 나타난 게 우리가 보는 그림이다. 허풍과 일반화의 오류가 여기에도 끼어든다. 유럽을 여행하며 받은 인상을 조형 원리로 삼은 작가의 순발력은 세계의 모든 문화 요소를 자기들 식으로 재해석하는 미국의 힘이다. 난 그가 일 년간 복무했다는 군 경력도 의심스러운데, 암호를 다루는 핵심 권한의 당사자에게 그 일을 맡은 자체가 기밀사항인데 어찌된 일일까.


Cy Twombly, Untitled, 1970. 이미지 출처 | Wikiart


 예술계는 아티스트를 스타로 키우며 그들의 경력을 포장한다. 이는 그림을 비싼 값에 많이 팔려는 화랑들과 미적 의미를 재생산하려는 이론가들, 그리고 지적 허영을 채우려는 수집가들이 공모한 결과다. 현학적 취미와 장난스러움이 뒤섞인 톰블리의 그림은 모더니즘 회화의 새로운 시도로서 알 듯 말 듯 하게 매혹적인 모양새를 띤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그에게 물어볼 길은 없게 되었으나 그래도 나는 궁금하다. 그렇게 훑어봤던 유럽 문화와 암호 체계는 매 순간 시험지를 받은 학생들의 심정처럼 절박했기 때문에 끌어 쓴 삶의 과정이었겠지?





 - 2015년 5월 대구문화 -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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