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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Mar 29. 2021

예술이 탄생하는
가장 일반적인 공식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카라 워커(Kara Walker)



 1985년에 해리슨 포드가 주연배우로 나온 영화 위트니스(Witness)는 요란한 볼거리나 심각한 주제의식을 두지 않고 기승전결 속에 소소한 재미를 담은 작품입니다. 마약범을 담당하는 주인공 형사가 파트너 후배형사가 느닷없이 살해당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습니다. 그 장면을 본 남자 꼬마와 그 엄마의 목숨도 위험하고, 이 모든 사건의 흑막에 경찰 조직도 엮여있단 걸 직감한 주인공은 마침 그 모녀가 바깥세상과 격리된 아미쉬교 마을이란 걸 알고 함께 숨어들어가서 지내고, (당연히) 행방을 찾아 온 타락한 경찰 패거리들을 하나씩  처단한다는 게 줄거리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하고, 특히 순수한 이 공동체가 집을 지을 때 마을사람들이 함께 노동하는 대목에서 해리슨 포드가 배우가 되기 전에 일하던 목수로서의 솜씨를 뽐내던 장면이 자주 생각납니다. 


위트니스(Witness) 포스터.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다 좋은 데, 결정적 장면 중에 조금 불편했던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나쁜 경찰 가운데 한 명인 흑인 형사(데니스 글로버, 리셜 웨폰에 멜 깁슨과 짝을 이뤘던 그 배우)가 해리슨 포드를 찾으러 곡식창고에 들어갔고, 그곳은 주인공의 덫과 다름 아니라 갑자기 갇힌 방안에 쏟아져 내린 옥수수가루에 악당은 익사하듯 최후를 맞이합니다. 옥수수가 아니라 귀리일 수도 있고요. 아무튼 그 영화를 본 누구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건 제작진이나 배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뭔가 하면, 백인들끼리 모여 사는 공동체를 침범한 흑인이 하얀 가루로 응징당하는 구도가 한 편으로 보자면 마냥 편하지 않았단 겁니다. 당연히 죽어도 싼 놈이지만 하얀 옥수수 분말을 메타포로 본 비평가가 이 세상에는 저 말고도 있었을텐데요.


A Subtlety, Kara Walker, 2014. 이미지 출처 | Wikiart


 자, 옥수수가루가 아니라 설탕가루예요. 설탕으로 거대한 조각을 만들었답니다. 그 사람은 카라 워커예요. 미국사람이고 흑인이고 여자입니다. 그는 2014년 뉴욕에 있는 설탕공장에 높이로 따져 10미터가 넘는 설탕 조형물을 완성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올해 데이트모던이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벌이는 전시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조각은 뚱뚱한 흑인 여자를 재현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아프리카계 여성인데 예쁜 대상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조디 와틀리와 나오미 캠벨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비욘세와 할 베리는 여전했고 케리 워싱턴과 알리샤 키스가 활동하던 2014년입니다. 이럴 순 있죠. 페미니즘 관점과 비슷하게, 있는 그대로 흑인여성의 모습을 긍정하는 차원에서 평범한 여성을 재현하기로요. 하지만 아닙니다. 카라 워커가 빚어낸 설탕녀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우습게 표현할 때 흔히 그려지던 빅마마(Bog Mama) 이미지였습니다. 머리에 든 것 없이 몸집만 큰 흑인 가정부의 모습 말입니다. 흑인을 가장 흰 설탕으로 표현한 이유는 흑백의 역전에 의한 시각적 환기도 있고, 설탕이 중남미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흑인들에 대한 착취로 만들어진 상품이란 역사적 의미도 컸을 터입니다.   


 하얀 빅마마를 두고 사람들은 말이 많았습니다. “흑인이 흑인 스스로를 까서 내리다니.”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은 무려 오바마였고요. 구경 오는 사람들은 또 어땠고요. 한국 사람들은 서구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잖습니까? 무식한 미국 관람객들은 그 설탕 조각에 혀를 대어 맛보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가장 민감한 부분이 집중 공략 당한 건 당연합니다. 카라 워커도 대중의 행위를 계산속에 넣었던 겁니다. 그를 미술계에 알린 작업은 흑인 스스로를 원숭이로 표현한 페인팅이었습니다. 작가는 어릴 때 자유주의와 보편적 인권의식이 팽배했던 캘리포니아에서 애틀랜타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두 도시는 천지 차이죠. 심지어 KKK단 같은 백인우월주의 운동이 지금도 활개 치는 곳에서 자랐던 작가가 당했던 멸시는 안 봐도 뻔합니다. 설움은 예술로 승화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술이 탄생하는 가장 일반적인 공식인 동시에 결코 누구나 이룰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하죠.(윤규홍, 예술사회학)


* 뭔가 찜찜해서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곳간에 갇혀 죽는 악당은 흑인형사가 아니라 퍼기라는 이름의 백인이더군요. 어쩐지, 애초에 그럴 리가 없었겠죠.




Retro perspective 2019 -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 / 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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