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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Apr 14. 2021

영화와 팝콘처럼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



 미술고교나 미술대학을 다니지 않아서 내겐 미술 선생님이 없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미술은 좋아해서, 좋은 전시를 어디까지든 가서 보곤 했다. 기본 학습이 안 되어서 그랬겠지만, 나는 그림을 볼 때 곧잘 음악을 들으며 전시장을 돌아다녔다. 왜, 좋은 건 같지 하고 싶지 않나, 영화와 팝콘처럼. 내게 미술 선생님이 있었더라면 꾸중 들었을 거다. 그게 옳지 못한 태도란 걸 깨닫기 전에 미디어 아트가 내 관심사 한 가운데에 들어서면서 나는 이어폰을 귀에서 빼게 되었다. 난 지금도 어떤 미술작품을 보면 그때 들었던 음악이 쌍으로 떠오른다. 예컨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그림을 보면 듀란듀란(Duranduran)이, 정병국의 작품 앞에선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Alan Parsons Project), 이런 식이다.


Girl in a Dark Jacket, Lucian Freud, 1947. 이미지 출처 | Wikiart


 화가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의 그림 앞에서, 나는 브람스 4번 교향곡을 떠올린다. 그 이유에 관해서 심각하게 고찰하진 않았는데 이 자리를 빌려 생각해보니까,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때문이지 싶다. 빈 교향악단과 협연하여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이 명반의 앞 껍데기에서 클라이버는 창백한 얼굴로 깊은 가을을 표상하고 있다. 풍성하게 결실을 맺는 가을이 아니라 에너지가 빠져나가서 퀭한 가을 말이다. 4번 교향곡처럼 화가 프로이트의 작품도 쓸쓸한 가을을 닮았다.


 여러분들 생각으로, 프로이트는 요하네스 브람스보다 구스타브 말러에 가깝지 않냐고 할 건데, 맞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느낌이니까. 말러처럼 끝없이 불안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한 그림 속 인물들은 앙상한 즉물성으로 우리 모습을 비춘다. 흔히 하는 이야기가, 화가 프로이트는 할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물려받은 직관으로 사람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말, 좀 무책임하지 않나?


Double Portrait, Lucian Freud, 1985 - 1986. 이미지 출처 | Wikiart


 오늘 날 심리학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가진 타당성은 대부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남은 건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라는 이름의 브랜드 파워다. 병원과 학계에서는 폐기된 이론이지만, 그 후광은 지금도 대중문화와 교양과 예술에 깊이 퍼져있다. 유감스럽게도, 대뇌가 아닌 간뇌가 맡는 우리의 직관 능력은 유전되지 않는다. 화가 프로이트가 조부의 유전적 기질을 물려받았을 뿐이며, 사회적인 명성은 조금도 상속 받지 않았다고 보는 입장은 미화된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얄팍함이 작품 매매가 최고기록 같은 세속적인 면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긴 한다.


 그는 동시대에 도달하기 전부터 미술 담론의 중심을 파격과 실험적 작업에 빼앗긴 사실주의 회화가 나아갈 한 방향을 가리켰다고 칭송 받는다. 하지만 그런 탁월함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여기에 할아버지의 명성을 끌어들인 건 당연하다. 성공한 모든 이들은 존경받을 점과 그렇지 못한 점을 함께 가진다. 내 기준으로 그에게 가장 빛나는 생애사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저 그런 화가로서 여러 장르와 기법을 건드리던 중에 조금이나마 주목 받던 초현실주의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주의로 넘어 온 일이다. 바로, 초현실주의야말로 할아버지가 있었으므로 생겨날 수 있었던 예술이 아닌가.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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