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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Aug 19. 2021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맨디 엘-사예 (Mandy El-Sayegh)

<수호를 위한 명문>



 리만 머핀 서울에서 열린 맨디 엘 사예 Mandy El-Sayegh의 개인전 <수호를 위한 명문>을 봤습니다. 말레이시아인입니다. 그림 공부는 주욱 영국에서 했고요. 지난 부산비엔날레에 초대되었습니다. 이력을 보니까, 2017년에 막스 마라 여성 예술상 경쟁 파이널에 올라 런던 화이트 채플 갤러리에서 전시한 작가입니다. 제가 막스 마라 패션그룹이 해마다 벌이는 그 행사를 알지만, 해당 연도에 이 사람이 노미네이트됐는지에 관한 기억은 없습니다. 

MANDY EL-SAYEGH transliterated cut script, 2021 (detail). Photo by Damian Griffith (이미지 출처 = 리만머핀)


 전시 정보는 대부분의 미술관, 갤러리 수입 전시가 그렇듯, 현지 텍스트를 문맥을 고려 없이 그대로 번역한 터라,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작가 이력은 일정 정도 포장이 있더라도 객관적인 정보는 됩니다. 삼십 대 중반,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맨디 엘 사예는 세계 곳곳에서 굵직한 전시를 벌였습니다. 리만머핀 갤러리도 그를 발탁하면서 야구로 치면 5선 발급, 그러니까 중요한 에이스급 작가들의 쇼 사이에 끼워 넣는 청년작가 전시용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커머셜 레코드를 찾아보니까, 중국 미술시장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에서도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화랑 측은 판단한 모양입니다. 얼마나 신경 쓴 전시인가 하면, 전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전시장 흰 벽 전체에 붕대를 감아놓은 것 같은 광경을 보게 됩니다. 하얀 거즈 밑으로 퍼런 멍 같은 얼룩이 있고, 붉은 피가 스며나오는 것 같은 상태의 은유적 재현이에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며, 응급처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작가는 이걸 넷 그리드(Net-Grid) 회화라고 정직하게 부릅니다. 

Mandy El-Sayegh: Protective Inscriptions Installation view, 2021 Photo by ARTMAP


 실크스크린을 뜬 그리드-격자 선은 평면을 거즈로 느끼게끔 하는 장치입니다. 선, 면, 색은 신문 오브제와 낙서, 캘리그라프 형태와 겹을 지워 일련의 우연 같은 효과까지 노립니다. 작품은 보기에 따라 끔찍하지만, 아름다운 느낌이 앞섭니다. 작가는 여기에 공간을 울리는 사운드가 더하여 한 층 더 제의 같은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사운드 자체가 알고 보니 독립된 작품이었습니다. "Chalk"는 누가 듣더라도 동남아 소승불교와 서구 음악계의 포스트 일렉트로니카가 문화접변을 이룬 사운드란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작곡가가 따로 있고요. 이건 염불하는 승려 음성과 종소리와 세속의 소음, 그리고 느린 비트에 F 코드로 들리지만 무조음악에 가까운 인더스트리얼 뮤직까지 합쳐진 사운드입니다. 비틀즈 화이트 앨범에 있는 "Revolution no.9"과도 비슷합니다. 완성해 가는  형식은 팻 보이 슬림과도 비슷하고요. 그 곡은 각 음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나로 묶이는 록밴드들의 사운드와 달리 Chalk는 소리가 서로 용해되지 않고 회화처럼 겹겹의 레이어를 이룹니다. 

 만약 이 사운드스케이프를 이어폰으로, 음악감상실에서 듣는다면 또 달랐을 겁니다. 현장에서 사운드는 건물 구조 안에서 이리저리 튕기어 혼란스러움을 더 했습니다. 이건 좋은 겁니다. 애당초 흡음재가 없는 생짜배기 화랑 공간 안에서 사운드는 제멋대로 울려서 귀에 되돌아오거나 소실되었습니다. 이 모든 효과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까요? 그럴 리가. 어쨌든 이 소리 재료의 파편은 이미지의 분산과 더불어 관객에게 일체화된 경험을 잘 전달합니다.

Mandy El-Sayegh : Protective Inscriptions Installation view. Photo by OnArt Studio (이미지 출처 = 리만머핀)


 작가가 일부러 노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이 전시 <수호를 위한 명문>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작가나 주변의 야심이 작업을 그 상태로 던져 놓겠습니까? 처음부터 배치된 혼란은 뭔가 더 그럴듯한 배후 스토리를 작화해서 맨디 엘 사예 그림의 미학과 시장 값어치를 보증하려 합니다. 그 스토리텔링이야 너무나 흔한 식입니다. 제3세계 국가에 부여되는 저개발과 이국 취향 아니면 뭐겠습니까? 애당초 작가가 서구인의 분류 항목에 맞아떨어져서 이 자리까지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작가가 본인 작업을 역사의 단절과 몸의 부조리함에 대한 표현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서구 백인이 아닌 출신 작가들은 언제까지 토착종교, 민속, 지정학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미술의 코어에 들어설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을 미술계의 평자들이 포스트 페미니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뭐라고 이름 붙이든 상관없이, 최근 정치외교학과 사회학은 그들보다 새로운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현상을 관찰합니다. 말레이시아는 많은 서구인이나 일본인의 시선에 종속된 한국인들 생각보다 훨씬 서구화되었고, 또 빈곤 국가가 아닙니다. 맨디 엘 사예같이 반쯤 영국 사람이 된 말레이시아인의 시선을 빌지 않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는 정당하게 기술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디 엘 사예의 작업이 단지 상업적인 쇼 안에 포섭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작품 안에 있습니다. <수호를 위한 명문>이 표현한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미지는 치료하는 붕대가 아니라 죽어서 썩어들어가는 육신을 가리는 염포로 보이기도 합니다. 상처 입은 주체가 엘 사예 본인이든, 여성 집단이든, 말레이시아든, 아니면 아시아 제3세계든, 누구를 대표하든 역사는 진행 중입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치유의 예술이 아니라 고발의 예술에 가깝습니다.




(윤규홍, 아트맵 디렉터/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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