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이전에 글로 다룬 바 있는 김정인 작가입니다. 개인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응노 미술관 M2 프로젝트룸에 갔습니다. 이 전시는 2021 아트랩 대전으로 벌어지는 릴레이전입니다. 김정인 작가의 그림에 관해 저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신작을 대하는데 낯섦이 느껴졌습니다. 이건 몇 가지 중 하나죠. 내가 그의 작업을 실은 잘 모르거나, 그동안 스타일이 획기적으로 바뀌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원래 작업이 언제나 낯섦을 감싸고 있다는 가정도 세울 수 있습니다.
작가의 그림이 평범한 재현체는 아닙니다. 많은 그림이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상황이나 시점을 한 화면 속에 쑤셔 넣어두고 있거든요. 그래서 쓰인 장치가 거울입니다. 거울에 깨지면 맺힌 상도 덩달아 여러 조각으로 비치잖아요. 그리고 또 다른 거울, 이걸 뭐라 부르죠? 도로에 양편에서 오는 자동차나 사람을 잘 볼 수 있도록 세워진 볼록한 거울 말입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거울에 비친 인물상은 오손 웰즈의 1940년대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거울 방 씬에서처럼, 쪼개어져 내비치는 인물을 표현합니다. 붓 터치는 참신하지만, 거울과 쪼개진 자아 설정은 미술에서 많이 다뤄진 소재입니다.
더 재미있는 건 따로 있습니다. 마치 캔버스 폭을 찢어놓으니까 그 아래 또 다른 그림이 숨어있다는 식으로 상상하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마블 코믹스 <데드풀>에 묘사되는 제4의 벽처럼 펼쳐진 서사를 뜬금없이 해체하는 형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인공 캐릭터가 만화 칸을 뚫고 나와서 만화책에 관해 품평하는 건 거슬러 올라가면 우디 알렌을 거쳐 베르톨트 브레히트에 닿겠지요. 물론 같지는 않아요. 제4의 벽이나 소격효과는 창작물 속 인물이 주체가 되는데, 김정인의 그림 속 대상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관찰한 대상이니까요. 찢어진 담벼락 안에는 어떤 텅 빔(space)이 있습니다. 작가는 무엇을 봤고, 어디로 향해 가려고 하는 걸까요,
화면 색조는 실재보다 몇 단계 가라앉은 듯 침울합니다. 그 안에 등장하는 오브제와 캐릭터들도 그 분위기에 부응합니다. 바삐 돌아가는 지금에 걸맞지 않게 낡고, 색이 바래고, 부서진 것들이 그림을 채웁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인플루언서들과 그 따라쟁이들이 인스타그램에 찍어 올리는 쨍쨍하고 화려한 사진 속 세계와 정반대 편에 있는 후줄근함만 수집해놓은 것 같아요.
물론 이런 게 젊은이들에겐 힙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작가도 그 세대군에 들어갈 거고요. 서브컬처가 예술을 지배합니다. 예술가가 서브컬처를 이끌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쉽습니까? 우리는 윌리엄 버로우스나 데이비드 보위가 될 수 없습니다.
전시장에는 작업에 관한 서술과 작가노트가 있었습니다. 거기엔 이미지의 용해와 해체, 그 이미지로 세계에 저항하고자 하는 작가 태도가 담겨있었습니다. 짐멜과 벤야민, 그리고 버만으로 이어지는 20세기 초중반의 모더니티 세계관이 남겨놓은 흔적입니다. 작가 본인과 관찰 서술가가 소개한 그 현상과 태도는 제가 볼 땐 지금 성취하지 못한 희망사항입니다.
이 전도유망한 화가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업 자체에 묘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더 열심히 그려서 완벽하게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아닌 그림으로 나아갈 테다?' 작가는 그림 그리기의 대부분이 고통이란 생각을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칫 지지부진함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금방 사십 오십 살이 됩니다. 이런 모순은 작가가 극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평생 안고 가야 할 지병과도 같습니다. 이게 김정인 작가만의 상황은 아닐 겁니다.
(윤규홍, 아트맵 디렉터/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