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티브 사진(Negative Photography)의 아버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은 인물은 아닐지 모르나 최초의 네거티브 사진(Negative Photography) 작가 중 하나인 오스카 구스타브 레즐랜더(Oscar G. Rejlander)는 진정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 놓은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조금 늦게 태어났더라면 온갖 특수 효과를 이용하여 세련된 SF 영화를 만드는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스카 구스타브 레즐랜더의 이중 자화상. 포토 몽타주이며 이젤 앞의 자화상은 ‘The Ginx’s Baby’ 라는 제목의 사진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자화상에서 그가 소총을 들고 기대어 서 있는 계단은 스튜디오에서 그가 사진 촬영을 할 때 자주 사용하곤 했던 소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이 예술 사진의 시초로 평가 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객관적 고증으로서의 사진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진의 계보를 거스른 우회 혹은 역행, 그도 아니면 순수 예술과 기록의 기능적 측면 등을 넘나든 그의 작업 방식에 있다. 비록 ‘사진의 암흑기’라 간주하며 사진이 독립적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지 못하고 회화의 형식을 쫓은 것이라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실 그는 오히려 당시의 초상화가들로부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참조용로서의 인물 사진 의뢰를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사진: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가족을 묘사한 사진으로 여러 인물과 정황의 합성을 통해 화면에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그러니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장인 정신’, ‘손 맛’ 등 가늠할 수 없는 예술가의 아우라(aura)을 갖춘, 장르간 구분을 타파한 급진적이고 세련된 예술가가 아닐 수 없다. 의뢰를 받은 것 이상으로 그 자신 역시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초상화가들의 행보를 쫓았다. 사진을 찍기 전 피사체의 세부적인 디테일까지 매우 세심하게 고려하여 연출하였으며 인화를 할 때도 가장자리나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한 점 등 회화 작가들이 즐겨 쓴 테크닉을 사진으로 구현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모델의 포즈와 의상, 조명이나 배경 처리 등이 전통적 유화로 그린 초상화의 형식과 흡사하게 보이도록 많은 부분 적극적으로 연출에 관여함으로써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을 카메라의 발명을 통해 전통적 초상화가들을 도왔다. 카메라 발명 이전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거나 귀족의 초상을 그렸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화면 구성과 연출에 대해 무수히 연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는 물론 당시 초상화가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함이기도 했겠지만 사진의 한계를 뛰어 넘는 가능성에 대해 행한 선구자적인 실험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디지털 장비들을 이용해 이미지를 조합하고 재배치하는 오늘날의 포토샵을 능숙히 다루는 사진가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차이점이란 그가 디지털 장비 대신 판유리의 네거티브 필름을 사용하고 인쇄나 노출의 정도를 고려하여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57년 오스카 구스타브 레즐랜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 ‘두 가지 삶의 방식들(The Two Ways of Life)’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그가 32개의 몽타주 사진을 합성한 것으로 무려 6주에 걸쳐 작업했다고 한다. 사진 속 두 젊은 여성의 시선이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데 한 쪽은 선의 축, 다른 한 축은 악의 축으로 나뉘어 한 화면에 제시되고 있다. 현대의 포토샵 기술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이 사진의 제작을 위해 모델을 하나 하나 자신의 스튜디오에 불러 찍었고 후에 모두 한 장으로 인화하였다.
어린 시절의 기록이 불분명한 레즐랜더는 1839년에 스웨덴에서 영국으로 건너왔다. 소묘와 회화에 능한 초상화가였던 그는 서른 아홉이 되던 1853년까지도 사진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거나 생계를 꾸리지는 못했다. 주로 시골 풍경을 찍던 그는 중복 인화를 하거나 프린트를 합성하는 등 콜라쥬(collage)나 몽타주(photo montage)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시도를 한 것이 그가 최초는 아니었지만 그는 다른 작가들보다 그 특유의 잠재적 매력에 빠져 훨씬 많은 공을 들여 일련의 실험들을 행하였다. 특히, 그는 서른 번이 넘는 인화의 과정을 거쳐 만든 작품, ‘두 가지 삶의 방식들(Two Ways of Life)’을 선보이며 대중과 평론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동료 작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던 이 작품은 그러나 일부의 비평가나 관람객들에게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레즐랜더가 사용했던 소위 ‘초기 포토샵 기술’에 대해 알지 못한 채 화면 속에서 천을 두른 채 남성들과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반라의 여인들이 창녀였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숱한 남성들과 어울려 함께 그의 연출대로 사진을 찍었을 것이라고, 사실은 한 사람씩 레즐랜더의 스튜디오에서 각기 찍혀 합성된 사진이라는 것, 빅토리아 시대적 배경을 갖는다는 것 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지금의 우리 또한 전통과 현대의 문물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많은 것들이 기억되고 보존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의식 너머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은 시대마다 달리 해석되거나 평가 받는 경향이 있기에 좋은 예술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많은 매체들로 인해 과거의 양식과 문물이 현재와 가까워 질 수 있게 된 시대, 더욱 많은 예술가들이 레즐랜더와 같이 과거의 매체를 적극적으로 도입, 변형하는 실험을 통해, 열린 마음을 가짐으로써 시대를 뛰어 넘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레즐랜더는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것이 예술’이라 믿었다. 매체의 성격보다는 예술가의 마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하는 것이 예술 작품이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에는 미소, 큰 웃음, 기쁨이나 불안 등의 순간의 표정이 잘 포착 되어 있다. 그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책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속 사진을 찍으며 심리학자로서의 찰스 다윈과 협업을 하기도 했다. 초상화가들에게 기술적 도움을 줌으로써 자신의 사진을 사진 발명 이전의 전통적 초상화의 형식을 닮게 만드는 역행은 예술이 기술이나 형식을 뛰어 넘어 어느 시대에서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절묘하게 보여 준다. 그는 집 없는 떠돌이 아이들을 비롯, 외면 당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을 담는 등 1875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기 전까지 당시로서는 드문 한 사람의 예술 사진가로 기억되었다.
글 | 김윤경(독립 큐레이터), 수성문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