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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Jan 22. 2021

펜과 붓을 든 도시의 만보객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 정경상


정경상 作.


화가 정경상의 회화를 보고 있으면, 나는 그림을 그리는 그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다. 작가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대형 서점에서, 백화점에서, 그 한 귀퉁이에 앉아 빠른 손놀림으로 크로키를 완성한다. 어떠한 내적 결핍이 그토록 치열한 동기 부여를 가져왔는지, 작가는 주변 세상을 계속 그린다. 이는 오로지 자신의 틀 속에서 이 시대의 불완전성을 그림으로 대신 채워나갈 것 같은 태도다. 그는 도시를 묘사하는데 건물이나 경관 대신 그 속에서 숨쉬고 있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시선을 둔다.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록하듯이 그려내는 작가의 화법은 그가 지금 여기에 예술가로 존재한다는 일종의 증명서인 셈이다.


정경상 作, 독서


 그의 작품 속에서는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갖추어진 패턴이 있다여기에는 순간의 정적인 이미지가 묘사되어 있다서양화가 권옥연(權玉淵)의 인물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측면으로 그려져 있다아이를 업고 있는 엄마들의 모정 어린 고단함책장을 뒤적이는 사람들의 권태작가가 묘사하는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여기에는 가련함이 깃들어있다이 순간의 포착이 있었던 다음그림 속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을까엄청난 행운이나 끔찍한 불행이 다가갈 것 같지는 않다모두는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세월은 빠르지만매 순간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모던과 콘템포러리를 구분하여 기술하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미술계에서 보자면정경상은 모던 아티스트다작가의 크로키에는 그가 그림 그리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하지만 동시대의 미술 흐름 속에서 그의 작품은 어떤 맥락으로 받아들여져야 될까신문지나 잡지전단지 같은 인쇄물 위에 그림을 그린 그의 작품은 그 형식만으로도 이 시대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맞다쉽게 구할 수 있는 그 재료들은 경제적인 제약을 돌파할 방법이 될 수도 있다이와 동시에바탕에 먼저 인쇄된 텍스트와 작가가 그린 그림 사이에 벌어지는 변증법적 충돌은 다양한 의미를 생산한다는 해석이 그의 작업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하지만 나는 이런 평면적 해석을 뛰어넘을 내적 요구에 귀를 기울인다그리고 작가가 마냥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정경상 作.


 화가로서 그림 그리는 일은 자유의지에서 시작된다. 작가 정경상이 살아온 이력을 돌아보아도 그렇다. 자유의지조차도 책임은 따른다. 그리길 원하는 재료와 대상을 늘 제한 받아온 그의 작업은 예술의 방임적인 일탈을 역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펜과 붓을 잡았다는 화가들의 출발점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바뀐다. 작가들은 유쾌한 명성이나 금전적 보상을 얻으면서, 자신이 수혜 받은 만큼의 등가적인 무언가를 세계에 되돌려주기 위해서 그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많은 미술가들은 자신이 확정한 그림 속에 틀을 짓고 그 속에 들어가서 바깥 세계와 어느 정도의 단절을 원한다. 작가 정경상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적어도 지금의 화법을 터득한 이후, 그는 펜과 종이 꾸러미를 들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독한 산보를 하고 있다.


 이 도시의 만보객으로서 작가는 자신의 사생이 삶의 무게를 오히려 더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현대미술에서 눈이 부셔 어지러울 정도의 혁신과는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그림 속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급격한 전환은 없다 하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의 삶이 예술은 아니다. 인생보다 예술은 길다고 하지만 예술 작품 또한 영원성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는 겉과 속이 흐릿하게 조응해가는 필체의 흔적 속에서 그 자신과 이 각박한 세계를 잇는 힘을 품고 있다.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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