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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Jan 23. 2021

누가 총기 넘치는 이 화가를
커피 잔 속에 머물게 했나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 홍지철


 그의 그림이 현실을 가리킨다고 말하자. 이 현실은 실재하는 세계 속의 한 장면이라기보다 대중문화 속의 전형적 캐릭터가 만든 현상이다. 서양화가 홍지철의 회화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현장 고발로 볼 수도 없고, 우리 일상의 시선이 미치는 지평 안의 한 장면도 아니다. 몇 개의 연작 종류로 나누어진 그의 작품들은 각각 견고한 질서 아래에서 고안된 도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낯설지만 한 편으로는 익숙한 그 도상들은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동시에 그것들은 뭔가를 감춘다. 다른 말로, 화가는 우리에게 자신이 세우고픈 기획의 전모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뭐, 내 생각에 이는 작가의 치밀한 전략이 아니고, 그렇다고 설익은 겉멋도 아니다.


홍지철 作.


 지금의 홍지철이 있게끔 한 커피 원두로 그린 그림, 또 그 그림 속 흑인 아이가 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어린이들은 아프리카 저개발국의 꼬마들이다. 화면 속에 다른 상징이 그려져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 눈에 알 수 있다. 대초원의 야생동물들처럼 바로 이 아이들도 아프리카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의 흑인 아이들이라면 지프나 후부 같은 브랜드 티셔츠를 입고 있을 터인데, 그림 속 주인공들은 앙상한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그림은 서로 다른 두 대상이 하나의 화면을 나누어 차지하면서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물론 가난한 어린 아이와 잘사는 나라의 대비로 이루어진다. 이 연작을 점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유에 대하여, 나는 작품 속에 흐르는 정서가 진중함 대신 명랑함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이걸로는 조금 부족하다. 기법에서나 그림의 형상에 있어서 얼마나 혁신적인 성취를 이루었는지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기법은 분명하다. 커피 가루를 캔버스 천에 안착시킨 면을 꼬마 아이가 차지하고, 물감을 얇게 발라서 나머지 부분을 대비시킨 이미지는 도발적인 실험은 아니어도 희소성 있는 시도는 맞다. 표면이 거친 화면은 저개발국의 아이로, 매끈히 정제된 표면은 선진국의 영역으로 나눈 것은 흥미롭다. 내가 조심스럽게 눈여겨보는 부분은 딴 것이다. 그건 두 가지다. 하나는, 작가가 왜 커피라는 담론 안에 사로잡혀 있는가? 다른 하나는 그가 내던지는 사회적 메시지가 지나치게 도식적인 고민이 아닌가? 나의 두 가지 물음에 대하여 작가가 언젠가는 작품으로 대답을 할 것이다.


홍지철, 매우 향기로운 세상 Extremely Aromatic World 1115_, Acrylic & coffee on canvas, 2011 이미지 출처 | 갤러리 래


 먼저,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나 스스로의 견해. 홍지철의 붓놀림 속에 배어있는 속도감은 처음에 단순한 착안으로부터 시작된 현재의 작업을 한 방향으로만 진전시키는 긍정적인 힘이다. 그에게 있어 기성 이미지를 자신의 그림에 빌어 끌어들이는 일은 현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회화의 묘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여기에 기대지는 않았다. 본격적인 작가로 나서기 직전에 그는 몇 가지 설치와 회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예컨대 <뽑기>(2008), <Dummy>(2009), <침묵과 실언>(2010), <Six-pack 연작>(2010)과 같은 전작들은 사회에서 훈육되는 객체로서의 몸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 작품들과 최근작들을 잇는 공통점은 역시 몸, 그리고 그 표현 선택으로서 풍자적인 방법이다. 풍자는 세계에 대한 분노 어린 관찰이 깔려야 되는 법이고, 덜 영글었던 그의 작가 의식은 차츰 틀을 잡아 왔다. 여기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일련의 사회 풍자를 해오는 과정에서, 작가가 커피 소비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담아낸 <Extremely Aromatic World>가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사건이었다. 이로서 작가는 딜레마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저항문화의 상품화 앞에서 서서히 생긴 작가와 작품의 균열은 그 틈으로 인하여 그의 회화를 좀 더 불안정한 매혹의 위치에 내던진다. 아마도 근작 <So Sweet Monroe>(2014)는 그와 같은 딜레마를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자백서이다. 달러 지폐와 신용카드로 채운 화면의 중심에는 원래 지폐의 주인공 대신 마릴린 몬로가 있다. 이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압도하는 미술시장 속의 회화 작품을 풍자한다. 이 연작은 <Extremely Aromatic World> 이전의 그가 시도한 팝아트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카페인 중독’으로부터 해독하는 길을 찾는 증거로 보인다.


홍지철, So Sweet Monroe 5, Acrylic on canvas, 130.0 x 56.0 cm, 2014 이미지 출처 | 갤러리 래


 두 번째 지적은 비판에 대한 비판이다. 그의 미술이 딛고 서있는 정치적 입장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 현재로서는 없다. 물론, 과거에도 없었다. 앞으로는 생길 것이다. 정치적 견해라는 것을 특정 당파에 대한 지지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작가가 나설 태도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는 보수층과의 거리두기가 아니다. 현실 비판을 하는 척 하지만 실은 하나의 유행 상품처럼 도식화된 입장에 대한 풍자는 불가능할까? 홍지철이 펼쳐놓은 세계의 비참에 관한 양면적 태도가 관객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실천을 불러일으킬까?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종속 이론을 따르지 않더라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은 불평등한 사회 체계가 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정치적 무관심이 맞다. 사람들은 브랜드 커피값이 밥값보다 비싼 이유도, 한국 전역에 들어선 가게들이 서울 도심의 비싼 점포 임대료를 나누어 부담하는 형식이란 사실을 모른다. 그의 그림이 취하는 시각은 이 지점까지는 뻗어있다.


 생각을 조금만 더 나아가자. 다국적 기업의 브랜드 커피의 대안이 공정무역 커피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산지 농가에서 직접 조달받아 거래시키는 공정무역 커피가 실은 그 도매가가 20년 넘도록 싼 값에 묶여있으며, 이 또한 대자본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되며 원산지 국가에게 여전한 착취가 벌어진다는 내막도 모른다. 사람들은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유니세프에 후원하고 이를 페이스북에 자랑한다. 이 모두는 문화 제국주의의 질서 속에서 벌어지는 저항의 이미지이다. 작가가 만약 앞으로도 그의 작품 안에서 커피의 향을 지속시키려면 적어도 이와 같은 기본적인 가정까지는 관객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어야 된다. 작가의 작업을 떠받히고 있는 자기성찰성은 이미 그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 전시를 보는 우리는 이미 그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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