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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Jan 25. 2021

집(들) Houses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 정광식


 우리 인지 체계는 재미있다. 사물의 배열이나 질서를 한 눈에 볼 때 수(數)는 색이나 형태만큼 뚜렷한 고려요소다. 사람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다섯 개 미만의 수는 금방 식별이 된다. 신호등의 램프 수는 파랑 노랑 빨강 화살표로 된 네 개다. 신호등불의 개수가 그 이상이 되면 위험하다. 일정한 수를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헤아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한 무리라고 인지한다. 한 사내의 애인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한류를 따라 북쪽 바다로 몰려가는 명태의 숫자가 3,252마리인지 3,253마리인지 식별하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많건 적건 그냥 ‘한 무리’식의 단수로 셈한다. 


정광식 作.


 조각가 정광식의 조각 하나 속에는 많은 숫자의 작은 조각들이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작품 한 점으로 본다. 여기에는 들도 있고 언덕도 있고 강도 보인다. 하지만 제일 구체적인 형상은 집(들)이다. 깎아낸 조각 돌기들 중에 일부에 선을 그어져 있고, 창문과 옥상이 그려져 있다. 그 많은 집들이 주위 환경과 높낮이를 가지런히 맞추어 들어섰다. 생태학자 장회익의 개념인 온생명처럼 하나가 전체이며, 전체가 하나인 덩어리를 이 조각가는 우리 앞에 선 보이고 있다. 작가는 이를 위하여 오석(烏石)을 연마해 내고, 그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채색하여 본인만의 체험적 경관을 재현한다.


정광식 作.


 사실, 집은 크기(넓이)라는 세속적 판단으로 평가된다. 우리말 표현 가운데 집채는 예컨대 산더미, 공룡, 거인보다 관용적으로 더 잘 쓰이는 낱말이지 않나. 정광식의 부조 작업을 접하는 관객들은 돌무더기가 매달려있는 무게감에 먼저 압도된다. 그 다음으로 낱낱의 단자들이 가지는 소박한 오밀조밀함이 기다린다. 당연히 커야 할 집과 산이 간략히 축소된 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인지부조화로 인한 긴장을 낳게 한다.


 작품 속 형상은 하나같이 닮아 있지만, 그렇다고 똑같을 리가 없다. 이것은 일일이 돌을 깎아서 채색하고 음영을 만들어 입체감을 살린 거대한 풍경이다. 이와 같은 경관의 해석은 회화적인 아름다움마저 자아낸다. 장르적 특성에서, 무수한 낱개가 모여서 전체의 패턴을 결정하는 그의 작업은 한국 단색화의 모노크롬 경향과 맥이 닿아 있다. 물론, 정광식의 부조를 전체의 양감과 균형미라는 조각의 본질로 즐길 것인지, 회화적 패턴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낱개마다 어려 있는 동화적 아름다움에 빠질 것인지, 그 결정은 보는 우리들의 몫이다.


정광식, 작품 1 2011, View-m.c-06. black gramite, Acrylic, 1200 X 600 x 20 mm, 2011

 

작가는 그동안 전시 제목과 작품 제목에 <View>를 즐겨 붙였다. “뷰”는 말 그대로 넓은 시야로 펼쳐보는 행동이다. 작품의 시점은 주로 하늘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부분에 관한 집착이나 독단이 당연히 배제된다. 따라서 이 약호화된 경관 속에는 획일성과는 다른 의미의, 일종의 평등함이 퍼져있다. 여기엔 일반 가옥뿐 아니라 제법 큰 빌딩들도 표현되어 있다. 이 건물들이 섞여있다면 그것을 마을이나 동네라고 불러도 좋은데, 작가는 작품 단위별로 하나의 건축 형태를 새겨 넣길 더 좋아한다. 이 클러스터(cluster)는 인문지리학에서 볼 때는 접근수준이나 자기충족률이 떨어지는, 따라서 현실성이 없는 공간이다. 그러면 어때. 리얼리티 대신 상상력을 채우는 게 예술이니까 이상할 것은 없다. 


 작가에게는 자신만이 꿈꾸는 세계관 내지 지리학적 방법론이 있다. 실재하는 세계와 상상하는 세계를 예술 속에서 화해시키고자 하는 그의 작업은 힘든 노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한 편으로 그 일은 모험이다. 그는 풍경이 담아내는 시각적 현실을 가볍게 흘려 넘긴다기보다 그 현실 속 이미지를 많은 숫자로 넘쳐나게끔 강조한다. 바로 이와 같은 모험이 우리 눈 앞에 마주하는 작품, 즉 부조와 환조가 상호보충하며 존재하는 명확한 존재, 동시에 추상적인 모노크롬으로 표현되는 작가 내면,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시선 속에 하늘로, 바다로, 산으로, 집으로 채워진다. 작가는 이것을 세계에서 자신만이 온전히 가지는 전망(view)이라고 부른다.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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