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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Feb 08. 2021

아, 마크 로스코…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예술 비평에서 가급적 쓰지 말아야 될 표현법 가운데 하나가 말줄임표다. 비평이 예술적 대상을 글이라는 다른 형식으로 바꾸는 일인데, 말줄임표는 작품을 문자로 대등하게 치환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말줄임표가 예술 작품의 여지를 표현하는 것이란 말도 다 핑계 같다. 그런데 나도 여기서 한 번만 써보자. 아.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No. 16, 1961. 이미지 출처 | Wikiart


 사실대로 이야기하지만, 내게 있어서 최고의 미술가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몽환적인 작품을 대할 때면, 실재 그림 앞에서나 도록을 볼 때나 나는 늘 탄식을 내뱉는다. 음반 회사에 소속된 기획자(A&R)들이 뮤지션을 발굴하는 오디션 장에서 “음... 아...”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A&R 대신 'Um&Ah'라는 별명이 붙은 것처럼, 로스코는 내게 ‘음앤아’ 아티스트다. 미술계 종사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로스코에 대해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


 주로 테두리를 엷게 두면서, 두 개의 사각형으로 식별되는 색의 나누어짐이 그려진 그의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준다. 꽤 오래 전에 한 매체에서 나는 이 색면 추상회화의 거장을 ‘빛의 응시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이들은 로스코를 이야기할 때 숭고미(sublime)를 빼놓지 않는다. 숭고미는 딱 잘라 말하긴 곤란한데, 엄청난 크기로 펼쳐진 실체 앞에서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두려움과 떨림 같은 거다.


Mark Rothko, Untitled (Green on Blue), 1968. 이미지 출처 | Wikiart


 요즘 들어 부쩍 드는 생각은 로스코가 색과 빛도 그림 속에 잘 품었고, 숭고미도 극적으로 드러냈지만, 공간을 새롭게 바라본 화가가 아닐까란 점이 이보다 앞선다. 그의 작품세계가 구체적인 형태의 재현에서 색면 추상으로 진화해 오던 시기는 194.50년대이다. 그 당시 회화는 어디로 가야 되었을까. 화가는 무엇을 그려야 되었을까. 이미 그때 영화는 단순한 볼거리를 벗어나 예술적인 잠재성을 자각하며 공간의 탁월한 재현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하물며 음악도 스테레오 사운드가 발명되고 보급되면서 예술의 공간은 현실의 공간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림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Mark Rothko, Blue, Orange, Red, 1961. 이미지 출처 | Wikiart


 이런 혁신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생전 그가 탐닉했던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영향으로 초월의 길을 택했을 법도 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너무 밝은 빛 아래에서 보는 걸 꺼려했다. 그러면서도 관객이 되도록 가까이서 감상하기를 원했다. 지금도 그림 좀 안다는 사람들이 전시공간에서 곧잘 취하는 자세 말이다. 이 두 가지 주문은 참 모순된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이 미국으로 이민 와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마지막에 택한 미술, 이런 사람의 머릿속은 당연히 복잡했다. 그래서 나온 단순한 그림, 이조차도 우울함을 완전히 떨쳐버리긴 어려웠나보다. 그의 일생 마지막에 기록된 사건은 권총 자살이다.





 - 2015년 3월 대구문화 -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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