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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맵 매거진 Mar 03. 2021

취향의 명함

콘템포러리 아트를 리뷰한다

| 박모, 혹은 박이소


 매번 미술에 앞서 음악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송구스럽지만, 이런 게 있다. 자기가 듣는 음악이 수준 높다는 걸 사람들에게 뽐내고 싶을 때 종종 등장하는 이름들이 있다. 팝 음악에서 조니 미첼(Joni Mitchell)이나 스틸리 댄(Steely Dan)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뭔가 있어 보인다. 클래식 음악에도 이런 위계에 있는 음악가들이 있을 거다. 내가 제도권 미술계에 얼굴을 내밀 무렵, 내가 어떤 미술가를 좋아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이따금 있었다. 진짜 궁금했는지, 아니면 뭘 떠보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 내가 끄집어낸 ‘취향의 명함’이 박이소였다.


박이소, <당신의 밝은 미래> (2002) 이미지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박이소를 그렇게나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게, 그는 내게 참 고마운 사람이다. 박이소, 본명은 박철호. 그는 많은 분들이 흠모하는 화가와 동명이인이며, 박모라는 필명으로도 알려진 설치미술가다. 지은이도 그 이름부터 요상한 이야기를 품었을 법한 존 스토리(John Story), 책을 번역한 사람도 박모. 뉴스에 나오는 김모, 이모, 박모씨는 도둑질에 사기에 살인을 저지르는 용의자인데, 이 박모씨는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이란 책을 번역했다. 이 입문서를 가지고 나는 문화사회학 공부에 발을 들여놓았다.


 문화 현상과 예술 작품을 비평하는데 필요한 정치경제학 기호학 정신분석학 현상학 여성해방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탈근대주의와 같은 여러 방법을 소개한 이 책의 번역자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에 매달렸다고 한다(바로 자신의 문제니까 그랬겠지). 여기에 반짝이는 조형감각까지 갖췄던 박모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꽤 주목 받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도 여느 한국 유학생들이 그런 것처럼, 똑똑하지만 수줍고 어리바리하게 공부를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박이소, <우리는 행복해요> (2004) 이미지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사회학에서 밝혀낸 유리천장(glass ceiling) 현상이라는 게 있다. 이건 위를 올려다보면 훤히 보이며 자신도 주류로 올라설 것 같지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가정이다. 거의 모든 유학파 엘리트들에게는 금기와 같은 이 사실 앞에 박모도 부딪혔다. 천성이 고왔던 박모는 이름까지 박이소라며 야심차게 바꿨지만, 자신의 미술을 한국에 와서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보이는 일에 괴로워했다.


박이소, <정직성> (1999 혹은 2000년으로 추측) 이미지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괴로우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노래방을 가는데 1990년대 문화였잖나. 그 당시 노래방에는 저작권 문제가 얽혀있어서 팝송이 몇 곡 없었다. 조니 미첼도 없고, 스틸리 댄도 없었다. 빌리 조엘(Billy Joel)은 있었다. 나도 불러 본 노래가 <Honesty>인데, 박모 혹은 박이소는 이 노래를 <정직성>이라고 바꿔 부르고, 그 노랫말도 종이에 썼다. 한 나라 말을 다른 언어의 체계로 바꿀 때 생기는 새삼스러움은 북한의 선전선동 문구를 그대로 따온 유작 <우리는 행복해요>가 정점을 이루며, 작업실에서 숨을 거둔 이후에 그를 경외감 짙은 존재로 만들었다. 박이소가 이루려던 예술 형식은 지금도 수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런 작가들에게 말하면 대부분 화를 버럭 낼 것 같다. 내가 볼 땐 뭐, 그 또한 ‘박이소’다운 진실한 능청스러움이다.




 - 2015년 12월 대구문화 -


글 | 윤규홍 (아트맵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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