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Intro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cedie Jul 26. 2021

My Own Private Idaho

Gus Van Sant


말에 때가 있듯이, 영화에도 (또는 책에도) 때가 있어. 나에겐 언젠간 볼 영화의 리스트가 매우 많은데, 언젠간 볼 거야, 볼 거야 해놓고 오래도록 안 보는 영화도 꽤 많아. 그러다가 조금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 영화를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사라지고 나면 우연히 그 영화를 가벼운 마음에 보게 되지. 대체로 2가지의 큰 결말을 맞지.

      

1) 영화가 나에게 딱 맞춰 도착한 경우! 최근에 본 영화 중엔 그런 운명이 느껴지던 영화가 없었던 것 같긴 한데....... 책은 있었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이야. 보르헤스의 글들을 조금 더 어릴 때 읽었다면 난 그의 글을 좋아하지 않았을 거야. 유명하니까, 좋아하는 척했을지는 모르지.      


2) 반대로 너무 늦어버린 경우가 있지. 물론 영화가 낡았다는 게 아니고 (하지만 낡아버린 영화도 물론 있다) 내가 어떤 시기를 이미 지나와서, 내가 달라져서, 사랑하게 되지 못하는 영화가 있지. 달라지기 전에, 옛날의 내가 이 영화를 봤다면 난 이 영화를 사랑했을 텐데. 그런 마음이 드는 영화들이 있어. 어제 다 본 “아이다호”가 그랬어. 

 
 이 영화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난 아이다호를 사랑했을지도 몰라. 마음에 품고 엉엉 울었을지도 몰라.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아. 음, 이 영화는 이런 영화이군, 그렇군. 그 정도. 그렇게 아끼던 이름이 흔해지는 경험. 그때 마음을 아니? 얻은 적도 없는데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 기대가 무섭지.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왜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냐고? 그런 생각을 한 건, 이 영화를 보고 내가 아파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도로에서 몸부림치는 마이클이 나 같지 않아서. 마이클을 이해할 수는 있겠는데, 그게 나와 동일시는 되지 않아서. 오히려 떠나는, 끝에 뒷모습을 보여주는 스캇을 이해해서. 그래서 이 영화를 사랑할 수 없었어.      

영화가 끝나고, 난 울지도 않았고, 술을 더 붓지도 않았고, 떠나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어. 괴롭지 않았으니까. 작은 장면에 쉽게 울곤 했던 지난날의 내가 생각나더라. 어디가, 왜, 어떻게 달라진 걸까, 나는?     



어쩌면 이제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들어.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누군가를 진심으로, 순수하게 사랑하기 어렵다고. 나는 그 이야기가 거짓인 줄 알았어. 처음부터 누군가를 좋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변명으로 만들어낸 이야긴 줄 알았어. 가슴 아프게 사랑한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벌써부터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억울해. 아닌가, 그런 사랑은 한 번이면 되는 걸까?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했던 경험을 거슬러 올라가 봤지. 중학교 때 좋아하던 오빠가 있었어. 그 사람의 이름을 운동장 한가운데 쓰기도 하고, 눈이 쌓이면 이니셜을 눈 위에 새기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바라지 않은 상태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 벅차서 행복했던 시절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론 만족이 되지 않아. 그 사람도 날 좋아했으면 좋겠고, 그 사람이 날 더 좋아했으면 좋겠고,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좋아하고 싶지 않고. 생각해보면 완전히 누군가를 좋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건 아니겠지. 근데 순수하게 좋아하게 되기가 어려워진 거야. 많은 것들이 두려워 많은 제약과 브레이크를 거니까, 온 마음을 다 걸 수가 없어. 그게 나를 지키는 법이라고, 온 마음을 걸었던 옛날의 내가 말해줬어. 가끔은 누군가를 짝사랑했던 내 마음이 그리워. 그게 진짜 온전한 사랑은 아닐까?라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어.      



영화 속에서 마이클과 스캇은 둘 사이에 불을 피워놓고 밤을 보내지. 마이클은 스캇에게 돈을 주지 않아도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너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나는 이제 누군가를 돈을 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야. 그러니까 무언가를 내게 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이제 내게는 없다.      


사실, 난 지금 마이클이 아니고, 그리고 이전에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닐 거라는 거야.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깨달았어. 나는 언제나 도로 위의 삶을 동경했지만, 언젠간 도로에서 다시 마주치는 인연들을 동경했지만 난 한 번도 거리 위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 살고 있지도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야. 한때는 내가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어. 나는 도로를 산책한 적은 있지만 (어느 정도는 산책자이겠지만) 진짜로 거리에 머무른 적은 없다.      


그런 적은 있었지. 내가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던 시절. 그리고 거리에 나를 버리고 떠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괴로움을 울부짖었던 시절, 그때 이 영화를 봤더라면 지금 나는 뭔가 많이 달라졌을까? 그땐 도로에 자주 주저앉았던 것 같아. 확실히.      


지금의 나는 거리에 없어.      


내게 어느 시절이 끝났다는 확인 사살을 최근에 너무 자주 당하네.      

매거진의 이전글 서론들의 서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