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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Mar 31. 2017

쓸쓸하지 않은 나의 아파트


  나에게 말을 거는 건축물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이 있다면, 나에게 말을 거는 건, 오히려 역설적으로 흔히 널려있는 “아파트”라는 풍경이다. 익숙하고 지천에 널려있는, 서울 하늘 아래에 서면 어디서든지 쉽게 눈을 돌리면 찾을 수 있는 건축이 바로 “아파트”이다. 그런 흔한 건축인 아파트가 오히려 내게 말을 건다.


  서울이라면, 특히 대한민국은 아파트가 다른 나라에 비해 넘쳐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좁은 면적에 많은 인구가 몰려 사는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특히 더 그 인구들을 감당하기 위해 아파트가 기본 생활 주거 양식으로서 자리 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풍경은 흔히 아파트 풍경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이런 너무나도 친숙한 일상의 아파트가 오히려 내게 말을 건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 같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하다. 아파트가 내게 말을 건다. 그런데 그냥 내가 아파트를 바라볼 때가 아니다. 아파트가 어떠한 특정 시간과 요소와 함께 할 때 그 모습은 나에게 말을 걸고, 더 포착하고 싶어 지는 모습이 된다.

  아파트는 주로 현대에서 삭막하고 차가운 건축 이미지를 대변한다. 실제로 그러하기에 나는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살아본 적도 없다. 그런 아파트가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은 아파트가 “자연”이라는 요소와 함께 녹아들 때이다. 푸른 하늘과 구름과 달과 함께 하는 아파트 풍경과 녹음이 함께하는 아파트 풍경 등, 그 오히려 황량한 풍경과 자연의 조화는 그 순간을 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너무 지천에 흔한 그 건축이 다른 시각으로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자연이라는, 모던 건축으로서 아파트가 내세우는 요소들과는 반대되는 이질적인 요소와의 결합일 때 그 아이러니가 그 건물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같다.

 


  아파트는 모던 건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대부분의 도시의 건축은 모던 건축이다. 아파트나, 종로나 강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고층 건물들이 그러하다. 모던 건축이란 FFF(Form follows fuction)라는 이념에 따라 건축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건축은 미적 양식보다 그 기능성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건축 양식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건축에 있어서 기능성, 효율성, 유용성 등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능성을 추구하는 모던 건축은 이른바 “국제적 양식”이라 불리며, 그 때문에 뉴욕이나, 동경이나, 서울에서도 동일한 건축에 의한 풍경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능성을 추구한 모던 건축 이념은 결국 형식의 획일화를 낳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파트”, 아파트는 어떻게 모던 도시의 풍경을 차지하게 된 것일까? 아파트라는 건축양식이 모던 사회의 주거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모던 사회에 이르러 산업화가 발전이 되었고 건축 또한 그러한 산업화된 사회에 맞는 건축 양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에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구 대비 좁은 면적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주거양식이 필요하였다. 이를 효율적이고 기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축이 바로 “아파트”였던 것이다. 노동자를 위한 주택의 대량 건설이 불가피했고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효율적인 건축으로 아파트라는 건축이 고안되었다. 이러한 아파트 형식 주택의 대량 건설은 자본주의 경제논리와 결합하여 노동자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품위를 갖춘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면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공급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적에 따라 건설되었다. 곧, 이러한 아파트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의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더니즘 건축은 그 한계를 곧이어 드러내게 된다. 기능성과 효율성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모더니즘의 풍경들은 모더니즘 건축이 추구하는 그 본질, “기능성”에 있어서 기술지상주의적으로 발전되었고, 이러한 기술지상주의적 성향이 자본주의 경제논리와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이를 통해 건축과 기업은 서로의 목적에 의해서 서로 맞물려 발전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건축의 산업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산업화로 인해 자본주의 논리는 더욱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삶의 영역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 아래에서 행해지는 결과로 귀결된다. 이는 건축 양식이 일상적 삶 또한 총체적으로 통제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전체주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로 기능성에 의한 건축은 삶을 총체적으로 재단하는 사태에 이른다. 이제 더 이상 “Form Follows Function”이 아닌 “Life Follows Architecture”로 모더니즘 건축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 구절을 잘 표현해주는 상황이 로베르트 무질, 그의 단편소설 “지빠귀”에 나온다.


  그곳에서는 여러 개의 부엌과 침실이 밖이나 아래를 내다보고 있거나 인간의 한 몸에서 사랑과 소화가 일어나듯이 나란히 접해 있지. 부부용 침대가 각 층별로 위아래로 차곡차곡 포개져 있기도 해. 왜냐하면 이 건물에는 모든 침실이 같은 곳에 있으며, 창문 벽, 욕실 벽, 장롱 벽 등이 침대가 놓일 자리를 거의 50센티미터의 오차 범위 안에서 정확하게 정해주고 있기 때문이야. 식당도 같은 위치에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고, 하얀 타일이 깔린 욕실도, 붉은 등잔 갓을 단 발코니도 마찬가지야. 이 건물에서는 사랑도, 잠도, 생명의 탄생도, 소화도, 예기치 않은 재회도, 근심으로 가득 찬 밤이나 사교 파티가 열리는 즐거운 밤조차도 자판기 속에 쌓인 빵처럼 위아래로 차곡차곡 포개져 있지. 이 중산층 주택에서 개인의 운명이란 이사 오면서 이미 정해지게 돼. 너도 인간의 자유란 주로 그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하는가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게 될 걸.

                     로베르트 무질, "사랑의 완성", '지빠귀', 최성욱  역, 북인 더 갭, 2015, pp.12-13.


  이렇듯 모더니즘 건축 양식에 의한 아파트라는 일반적인 모던의 주거 양식은 그 건축양식에 있어서만 형태의 획일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모던이란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까지도 획일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앞의 소설에서 나온 아파트 형태에 의하면 아파트라는 건물은 각 층의 건축 형태가 50cm의 오차범위 내의 차이만 있도록 지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파트 위층에 침대가 놓이는 곳에 아래층에도 침대가 놓이고, 아파트 아래층 장롱이 놓이는 곳에 아파트 위층의 장롱도 놓인다. 이러한 건축의 획일화된 형태는 결국 삶까지도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사태에 이른다. 그 모습을 무질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건축의 획일적인 모습은 그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까지도 모두 동일하게, 획일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건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모던 건축이 기능성과 효율성을 그 목적으로 하여 발전해왔기에 모던 건축의 양식에 있어서 모던의 이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던을 계승하고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중 포스트모던 건축은 모던 건축과의 관계를 통하여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그 이념을 확실히 정립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건축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모던 건축은 그 건축 양식이 되는 기능성을 이해하기 위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를 필요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던 건축은 지적이고 엘리트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모던 건축의 언어는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보편적인, 일원적 언어 사용으로 한정되었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이러한 모던 건축에 성격에 반대하며 모던 건축이 엘리트 중심주의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건축 언어를 따라서 포스트모던은 향토적 요소, 전통적 요소, 상품광고의 상투적 요소를 수용하여 건축의 언어를 여러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는 이중 코드의 사용이며 즉, 다양한 언어를 혼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세히 말하면 전통적인 언어와 현대의 언어, 엘리트의 문어와 통속적인 구어, 국제적 언어와 지역적 방언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포스트모던 건축은 모던의 일원적인 언어로부터 다원적인 언어로의 사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포스트모던 건축은 모던 건축에 대한 반항으로 모던 건축에 있어서 무시되었던 장식의 복원을 주장하였다. 장식성은 모던 건축에 이르러 유용성이라는 목적 합리성에 의해서 무시되고 희생되었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에 이르러 장식은 미적 형식의 상징으로 여겨져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복원되게 되었다.

  그중 내가 주목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던이 추구했던 장식의 배제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모든 도시들은 모던 건축들로 넘쳐난다. 지난 시대 동안 도시를 발전시킬 때 함께 했던 사상은 이른바 모더니즘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 도시의 모습은 모더니즘의 풍경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모던의 건축들을 다 붕괴시키고 소멸시켜야 하나? 그리고 그 땅 위에 다시 도시의 풍경들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하다. 우리 주변은 이미 도처에 모던의 건축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식성이 주목할 만하다.

 나는 모던 건축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그나마 쉽게 그 문제를 해낼 수 있는 것이 포스트모던 건축의 “장식성”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모던의 풍경에 장식성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모던의 풍경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낙관적인 생각을 한다. 또한 그러한 장식성을 물론 기존의 모던 건축에 추가적인 건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나는 자연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보는 것을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파트를 모던의 기능성과 효율성이 아닌 감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과의 어울림, 그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는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추가이다. 모던의 삭막한 도시 풍경에 녹음을 추가하는 것으로 간단한 방식으로 이행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들이 완전히 포스트모던의 이행이라고도 할 수 없고, 완전히 모던을 극복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간단하게 모던한 이 삭막한 풍경들을 쉽게 다채롭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민형원 교수님의 수업에 많은 영향을 받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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