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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Apr 11. 2018

나는 왜 아직 그 방을 떠나지 못하나

이병률 “그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왕가위 “해피투게더”

17. 나는 왜 아직 그 방을 떠나지 못하나

- 이병률 “그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왕가위 “해피투게더”


그 사람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

충분히 기억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 목을 조른 사람이거든요

처음부터 나중까지 오래
올 수 있으며
한참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

지금 여기 없습니다
내게 칼을 들이댄 적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내게서 벗겨진 것들은 그에 의해
다시 더 작은 파편으로 파괴되고 없습니다

나를 어찌하려다 허공을 가르던 손톱으로
내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를 꺼내 가려던 그 사람을 세계는
이쪽으로 인도하여 나를 찾게 하지 말 것이며

세계는 
그를 앞만 보지 않게 할 것이며
그 사람을 거듭 그 사람이게 하지 말 것이지만

내게 공중에 버려지는 고된 기분을
여러 번 알리러 와준 그 사람을
지금 다시 찾으러 가겠다고 길을 나서고 있는 나를
나는 어쩔 것인가요

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중 "그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2017.



  한 영화가 꼭 내 사랑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오래도록 앓고 있었던 내 사랑을 나는 여러 영화 속에서 찾고는 했었다. 어떤 날은 왕가위의 “해피투게더(춘광사설)”가 꼭 내 사랑 같이 느껴졌다. 그 사람은 보영이고 꼭 나는 아휘인 것만 같았다. 영화 속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 보는 내내 나는 보영을 사랑하는 아휘였다. 그러나 영화 속 아휘처럼 끝내 보영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보영 같은 이들이었는데, 그들에게 보영을 이해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영을 이해하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 조금은 이 괴로운 마음이 나아질 거라고,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다. 이해라니, 이해라는 말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지도 깨닫지 못하면서.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보영을. 그리고 이해하려고 했다, 그에 대한 모든 의문과 의아함을. 나는 내 식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거다. 나는 결국 그 자체를 받아주려고 하지는 않았던 걸까. 




  영화 속에서 아휘는 어느 순간 보영이 다시 돌아오곤 했던, 돌아올 수 있는, 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방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휘는 언젠간 떠날 것이다. 친구는 그래도 결국엔 보영이 돌아가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그렇다. 아휘는 그 방을 버렸지만, 보영은 다시 되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 아휘가 기다려야 하느냐 라고 반문했다. 나는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가 또다시 조금 더 머무르지 않고 떠나는 너를 계속해서 그 방에서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너는 완전히 안 올 것처럼 떠나다가도 떠난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네가 다시 찾아오기에 너를 그 방에서 기다렸다. 그 기다림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내 마음들은 조각조각이 났다. 나는 계속해서 홀로 남겨졌으며 버려진 것 같아. 그 사람은 내게 처음부터 나중까지 오래올 수 있으며한참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오면서 오지 않는 사람. 계속되는 반복과 더욱더 조각나는 마음들은 더 이상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더 이상 이곳에 내가 머무르면 내가 파편이 되어 없어질 것 같았다. 그런 마음에 아휘도 그 방을 떠났지 않았을까? 늘 보영은 돌아왔으나, 떠나는 보영을 바라보는 아휘는 보영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아휘는 보영을 기다리는, 보영이 돌아올 그 방을 떠나기로 했고, 아휘는 갔으므로 이제 오지 않는다. 아휘는 떠났음으로 보영은 아휘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왜 나는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당신을 찾고 있는 걸까? “내게 공중에 버려지는 고된 기분을, 여러 번 알리러 와준 그 사람을, 지금 다시 찾으러 가겠다고 길을 나서고 있는 나를, 나는 어쩔 것인가요” 내가 떠난 그 방에 혹여 당신을 들어와 살면서 외로움과 슬픔을 안고 지낼까 봐... 그런 보영의 모습이 당신에게 겹쳐 보여서일까? 나는 왜 아직 그 방을 떠나지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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