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cedie Mar 18. 2018

공중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병률, "이토록 투박하고 묵직한 사랑"

16. 공중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병률, "이토록 투박하고 묵직한 사랑"


허공을 향해 날아갔으나
착지하지 못하는 돌
벼랑 너머로 굴러 떨어졌어도
어디에도 닿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돌
첨벙 소리를 내며 물로 빠졌으나
가라앉지 않고 이리저리 물살에 쏠리는
삼켰으나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 안에 머물러 있는 돌
감정을 시작하고 있는지
마친 것인지를 모르는 것처럼
눈을 감으면 배가 고파서
더 먼 곳을 생각하고
월요일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면서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상해한다
멍하니 떠 있던 시소는 아무도 올라타지 않았는데
한쪽으로 기울고 있으며
계절의 겨랑이에 돋아나던 깃털은
어느 날엔가는 자라는 것을 관두었다
발을 땅에 붙이고서는 사랑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완벽한 사랑은 공중에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어찌 삶이 비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중 "이토록 투박하고 묵직한 사랑", 문학과지성사, 2017.



  “허공을 향해 날아갔으나 착지하지 못하는 돌”, “어디에도 닿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돌”

  돌을 던지면, 돌은 포물선을 그리다가 땅으로 떨어진다. 그건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이 시에 나오는 돌은 포물선을 그리다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 돌은 허공을 향해 날아가나 착지하지 않는다. 중력의 법칙에 적용받아 돌은 땅으로 떨어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는 마땅한 일들이 이 시에서는, 이 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돌은 착지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허공에 매달려만 있다. “가라앉지 않고 이리저리 물살에 쏠리는” 물속에서도 가라앉지 않고 이리저리 휩쓸릴 뿐이다. 돌뿐만이 아니다. “멍하니 떠 있던 시소는 아무도 올라타지 않았는데 한쪽으로 기울고 있으며” 이 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소 이상하다.

 

  중력을 받는 땅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땅은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땅에는 사람들이 서있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상이라 말한다. 땅은 안정의 공간이다. 땅 위에 있는 것들은 중력에 법칙에 따라 제 자리에 잘 붙어있다. 반면에 허공에 있는 것들은 때로 불안하다. 그것은 언제 떨어지고, 언제 추락하지 모르는 것들이다. 이렇게 보자면 땅에 비해 허공은 불완전한 곳이고 그렇다고 느끼는 곳이다. 그런데 시인은 사랑은 삶의 비밀이라고 말하며 사랑이 삶의 비밀이 되기 위해서, 완벽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 사랑은 공중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사랑은 불완전한 그 공중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일까?



  사랑은 마치 감정이 언제 시작하고 마치는지를 모른다는 것처럼 처음과 끝이 명확하지 않다. 처음과 끝이 불분명하니 인과나 논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동시에 낭만적이기에 현실에서 가장 벗어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이 침범하는 곳에는 완벽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아닐까? 불완전해 보이는 돌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모든 논리와 인과에 맞지 않는 일들은 다른 곳이 아닌 사랑에게서 일어난다. 사랑이란 이름은 합리를 무력하게 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설명이 불가하며, 비논리적이다. 그러한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땅이 현실적인 공간이라면 하늘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공간에 해당할 것이다. 사랑은 공중에 있어야 한다는 건, 땅에 발을 붙이고선 알고 있는 그 사랑은 초월은 불가능하다는 것 일거다. 사랑만이 떨어져야 하는 돌을 허공에 매달아 놓을 수 있다. 인간이 초월을 상정할 수 있으니 사랑으로서 인간은 초월에 가까워지고, 현실과 초월, 그 사이의 간극을 엿보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발에 땅을 붙이고는 사랑을 따라잡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일상을 떠나 거리로, 공사가 완료된 퐁뇌프의 다리를 떠나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났던 연인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안락함이 있는 일상을 버렸다. "월요일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면서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상해한다" 월요일은 일주일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주말이 끝나야 돌아오는 날이다. 그러니까 주말의 안식을 끝내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는 날인 것이다. 일상이 시작되면 다시 나의 일상 나의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시 속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면서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상해한다." 사랑의 시간이 주말이라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그런 사건이라면, 그렇지만 다시 우리는 월요일이 시작되면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사랑하고 있는 이는 다시 돌아온 일상이 낯설다. 그렇다면 완벽한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상에서 벗어나고, 현실에서 벗어나는 일인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타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타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그건 내 일상의 자리에 타인의 가능성을 마련해두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기존에 지키고 있던, 월요일에 지켜야 하는 일상은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타자를 받아들이는데 나 자신이 온전한 상태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타자를 지배하거나 타자와 나는 소통하지 않는 관계로 평행선이 유지되는 것일 뿐이다. 


  사랑의 달콤함은 마치 월요일이 오기 전의 주말 같다. 주말이 달콤하면 월요병에 걸리기 쉬운 것처럼. 사랑의 달콤함과 타인이라는 미지는 내 일상을 뒤 흔든다. 사랑은 내 논리와 인과를 흔든다. 그렇다고 늘 그런 상태로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로 머물자는 건 아니다. 우리는 소통하면서 서로에게 서로의 자리를 내주고 융합되어 갈 것이지만 그 미지의 존재는(타자이기에) 나를 계속 흔들 거고 중요한 건 그 흔드는 타인의 미지를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허공에 매달려있는 저 돌이 착지해도 다시 허공에 매달려있는 돌은 나올 것이고. 그걸 받아들이자는 거다. 그게 사랑이니까. 그건 맞을 거다. 그게 사랑이다. 



이전 15화 사랑은 함께 타락하고, 파괴하는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