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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미 Jul 31. 2023

서양미술사의 고찰 (15세기 미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chapter 13-15)를 읽고


 암흑시대로 불린 중세를 지나 미술계는 새로운 흐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미술은 고전을 추구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개발하고자 하였고 그 외의 지역에서도 각자 나름의 방식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례 없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다양한 시도 끝에 르네상스에 다다르게 되었다.

기베르티 <세례받는 그리스도>
피에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

중세를 지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미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초 사람들은 미술의 역할을 성경 이야기 표현에 그치지 않고 현실세계의 모습을 반영하는 데로 확장하였다. 현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이 시대 미술가들은 다양한 실험과 탐구를 하였는데 이는 중세에 벗어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 생각하였다. 중세 때에는 미술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 전반적 발전이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속도를 보였다. 그러나 중세 말기, 봉건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고 길드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이의 세력도 점차 커져갔다. 이러한 현상은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길드가 생겨나면서 미술 쪽에서도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전수해 주는 유파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후원자들이 이들에게 작품을 주문할 때 재래의 인습적 작품을 요구하지만 작가는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여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절충안을 제시하였던 작가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알베르티를 예로 들 수 있다. 알베르티는 그리스의 콜로세움 기둥 양식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고딕 양식을 융합하여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전통과 근대의 조화는 15세기 거장들 양식의 특징이었다. 또 다른 예로 기베르티의 <세례 받는 그리스도>는 구성 방식에서 중세와 유사하지만 힘차고 실감 나게 인물상에 특징을 주면서 표현을 명료하게 하였다. 더불어 중세에는 빛에 따른 명암 처리를 하지 않았지만 피에로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서 원근법, 단축법 등 기하학적 요소에 더불어 빛의 처리까지 선보였다.

장 푸케 <성 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프랑스 샤를 7세의 재무 대신 에티엔 슈발리에>

 15세기의 북유럽은 중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던 이탈리아와 목적은 유사해도 수단과 방법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14세기 건축에서 유행하던 우아한 레이스와 세공 같은 풍부한 장식이 15세기 강화되어 복잡한 트레이서리와 환상적 장식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고딕 양식에서 나타나는 수직적 요소가 강화되어 소박하면서도 세속적이라는 모순적 인상을 주었다. 장 푸케의 <성 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프랑스 샤를 7세의 재무 대신 에티엔 슈발리에>는 조용하고 조각상 같은 인물을 명암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작품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물 질감 표현에 신경 쓴 부분에서 얀 반 에이크의 북유럽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15세기 중엽, 독일은 미래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뿐더러 인쇄술이 발명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방식은 유사하나 그림 인쇄술이 글자 인쇄술보다 앞섰고 그중 목판화가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당시 목판화의 발명으로 설교 책에 성경 내용의 그림을 찍어내거나 목판화 그림만 따로 모아 책으로 엮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텐베르크가 글자 인쇄술을 개발한 뒤 목판화가 사용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더불어 당시 미술가들은 목판화로 표현하기 힘든 세밀한 묘사나 관찰력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동판화를 발명하게 되었다. 동판화는 목판화와 다르게 긁어내는 방식으로 세밀한 묘사와 미묘한 효과가 가능하였다. 붓이나 물감등을 사용하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세밀하게 보여준 점은 당시로서 기적에 가까웠다. 이탈리아의 브루넬리스키가 고딕 양식에 종지부를 찍었듯이 북유럽 미술에서는 판화가 발명됨으로써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다.

라파엘로 <대공의 성모>
라파엘로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16세기 초는 미술사 중 가장 위대한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많은 거장들이 이 시기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원근법을 위해 수학을 공부하고, 인체구조 탐구를 위해 해부학을 공부하는 등 이전 시대보다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당시 미술가들은 단지 공방의 우두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그들 만의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전까지는 미술가들의 대우가 그다지 좋지 못하였고 군주가 화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개념으로 작업을 맡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입장이 바뀌어 후원자들이 거장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미술가들이 주문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작가들은 후원자의 요구나 억압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다르게 라파엘로는 부드러운 성격을 지녀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 속에서 많은 작업을 해왔다. <대공의 성모>에서는 다양한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색감이나 표현에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을 보면 이상화된 모습보다는 권세를 드러내거나 편안하지 못한 상황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작업을 해온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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