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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그친 아침의 풍광

물비린내와 지렁이에 대한 추억

by 우 재

이번 주 들어 낮기온 22도까지 연일 올라가며 봄치고 좀 높은 기온을 보였다. 지난 주말 눈이 내렸던 것이 마치 1년 전 일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게 달구워져서 그런지 간밤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가 그쳐 있어 기본 운동을 하고 산책을 나갔다.


날씨 앱을 보니 비가 올 것이라 하여 우산을 챙기고 레인코트까지 받쳐입고 나갔지만 내가 걷는 동안에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하얀 구름 사이로 쨍하게 솟은 맑간 해가 나를 스포트라이트로 비추듯 비춰주었다. 나는 흐린 날 산책을 좋아하는데, 비가 내린 다음 날의 맑디 맑은 하늘에 떠오른 청명한 해가 눈도 뜨지 못하게 반짝이니 이를 반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집에 돌아오자 다시 흐려질 것은 무어람! 그럼에도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후의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이 아닌 광풍제일(光風霽日)한 날의 상쾌함을 맛보았으니 감사, 백번 감사.


20220319_082638.jpg 맑게 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비가 온 다음 날 산책길을 하면 특별한 경험이 따라온다. 물비린내와 지렁이이다.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할 때나 비가 온 다음 날이면 물비린내가 진동할 때가 있다. 오늘 아침, 동네의 골프장 주변을 막 지나가고 있을 때 밝은 햇살에 땅의 물기가 증발하는지 물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순간 잠깐 역한 느낌이었지만 이런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이런 냄새를 물비린내로 알아챌 수 있는 나의 감각이 놀랍기만 했다. 흔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냄새가 순간의 후각적 자극에도 발현이 되다니!


20220319_083844.jpg 자작나무가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인다.



비가 온 다음날에 경험하는 또다른 것으로는 지렁이가 있다. 비가 오거나 비온 다음 날 보도블럭 위에는 상당히 많은 지렁이가 나와 있다. 처음에는 얼마나 징그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렁이가 많다는 말인 즉 땅이 비옥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주택이 보편적인 미국 사회이니 정원에 얼마나 많은 지렁이와 미생물이 살고 있을까? 평소에는 땅속에 살아 있는지도 몰랐던 녀석들이 비가 오면 자신의 존재감을 어김없이 인도 위에 드러내는 것이다. 정원과 맞붙은 보도로 잔뜩 기어나와 물기가 촉촉한 보도블럭에서 땅속의 물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많던 지렁이가 날이 개인 다음에는 보이지 않으니 다시 제 집을 찾아 땅 속으로 돌아간 것인지 항상 궁금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직 한국에는 아파트가 보편적인 주택구조가 아니었다. 대부분 주택에 살았다. 그때는 비가 오면 사방 천지에 지렁이가 기어다녔다. 지렁이를 피해 걸어다녀야 했다. 그런데 아파트 문화가 보편화되고 아파트 단지와 차도에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깔리고 인도에도 보도블럭이 깔려 흙을 밟는 일이 드물어진 이후 지렁이를 잘 보지 못했다. 어쩌다 봐도 몇 마리였을 뿐.


그렇게 지렁이를 오랫동안 잊고 살다가 미국에 와서 이 놈들을 무시로 흔히 보게 된다.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대상에 대해 가지는 편견이다. 지렁이가 얼마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지 과학시간에 배워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죄없는 지렁이는 인간의 관심 밖에 있었고 하물며 징그럽다는 멸시까지 받아야 했다.


아침 산책에서 돌아와 물비린내와 지렁이를 떠올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지렁이를 꽁꽁 땅속에 유폐해 버리고 이 놈들에게 조그만 땅도 허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발전했다 생각했지만 더 큰 의미에서 우주의 순환을 거스르는 짓을 저지르며 살았던 것이다.


이제 애크론에도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참나무과 나무들이 많아서 그런지 새싹이 연둣빛이 아닌 붉은 색으로 돋는 것이 볼 때마다 신기하다. 새싹은 당연히 연두색이라는 나의 오랜 통념이 미국와서 깨어졌다. 땅에서도 구근 식물들이 잎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스노우드롭도 여기저기 만발했다. 조만간 튤립과 수선화도 볼 수 있겠지.


20220315_090638.jpg 소노우 드롭
20220319_084746.jpg 힘차게 밀고 올라오는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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