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반전
유튜브에서 지성인들의 강의 영상을 자주 본다. 나는 편식적인 사람이라 좋아하는 학자들의 영상은 모두 다 찾아 보는 편이라면 나와 잘 맞지 않는 지성인의 강연은 다시 보지 않는다. 여기서 나랑 맞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무리 유명하고 뛰어난 학자라도 인간성에 하자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 중에 두 남성학자가 있다.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미학자이다.(실명은 거론하지 않겠다) 미학자의 책이 좋아서 그의 책을 꽤 보았고, 온라인에 올라온 그의 강의도 자주 들었다. 철학자의 강의도 종종 들었다. 그런데 언젠가 두 사람이 같이 대담하면서 희희덕거리며 여성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을 들으며 지성인이 공개된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나 싶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물며 공개된 방송에서 이럴진대 일상에서는 오죽할까 싶어 만정이 떨어졌다. 시대를 앞서가는 줄 알았던 두 지성인의 머릿 속에는 여전히 여성을 열등시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무의식이야 말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이 젊은이를 상대로 많은 강연을 하고, 그 강의를 진지하게 듣는 청소년들이 많다는 것이 걱정스러울 정도다. 20대 젊은이들에게서 데이트 폭력이 많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종종 보는데, 아직도 지성인들 입에서 이런 여성 비하가 쏟아지는 세상이니 젊은이들이 윗 세대의 남성들에게 배웠지 어디서 배웠겠나 싶어 심히 우려스럽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바뀌지 않는다.
왜 이런 이야기를 글의 서두에 꺼내느냐 하면 어제 유튜브에서 강의 영상을 하나 보면서 두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떠오른 이유는 글의 말미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어제 본 영상과 영상을 본 이후 나의 생각을 써보려고 한다.
종종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좋은 영상을 연결시켜 준다. 어제도 알고리즘 덕분에 박구용 교수를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자주 뒷북인 사람이지만, 그의 강연을 듣고 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어준의 <월말 김어준>이란 방송에도 출연하며 이미 많은 팬을 거느린 지식인이었다. 그는 전남대 철학과를 나와서 현재는 전남대 철학과 교수를 하고 있는 분이다. 유튜브의 댓글 중에 “전남대의 자랑”이란 글이 있던데, 전남이 자랑하는 실천하는 지식인인 모양이다.
어제 내가 본 유튜브 영상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올려놓은 <미술관 아카데미> 라는 미술사 관련 강의 영상이었다. 박구용 교수가 강의했던 주제는 <With 코로나 슬기로운 예술수업: 철학자가 본 재미있는 미술> 이었다. 2시간이 넘는 강의였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미술사에 관심있는 분은 한 번 보시길. (www.youtube.com/watch?v=8OTxaLGXjDI )
미술작품들을 보며 강의를 이어가던 중 박교수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청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에게 누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무엇을 볼래요?” 우리는 이런 질문을 이미 많이 받아 보았다. 대답도 이미 알고 있다. “달을 봐야지요. 손가락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수단이니까요.” 달은 진리를 상징하며 손가락은 진리로 인도해주는 수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우리는 달을 봐야한다는 답을 알고 있을 뿐더러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달을 본 다음에는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강을 건넌 다음에는 나를 건네 준 나룻배는 강가에 두고 목적지로 떠나야한다. 그러나 달을 이미 보았고, 이미 강을 건넜는데도 여전히 손가락과 나룻배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도몽상이고 집착일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한발 앞서나간 해답까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박구용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두 가지를 다 봐야지요.”
헉! 놀라움과 함께 나는 바로 그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는 그림 속에 묘사된 여성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여성을 이렇게 묘사한 주체자가 누구인지 봐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가부장제에서 나온 문화는 여성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기 보다는 남성 중심에서 남성의 판타지에 맞게 여성을 환상화시키거나 반대로 혐오시했다.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은 바로 남성의 환타지가 반영된 여성상이다. 하나같이 여성은 다소곳하고 관능적이며 심지어 누드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까지도 예술가의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또한 20세기말까지도 전세계는 가부장제 문화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림에 묘사된 여성은 여성이 바라본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손가락이 가리킨 여성이었다. 박교수는 역시 철학자다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즉 같은 달(여성)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남자가 가리키느냐, 여자가 가리키느냐에 따라 달의 모습이 달라지니 손가락과 달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남성이 바라보는 세상과 여성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르다. 따라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누구인지가 달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오히려 달 이전에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의 주체가 누구인지 먼저 치밀히 살펴보아야 그들이 가리키는 달에 감춰진 함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문학에서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판타지에 맞게 여성의 미덕을 규정하고 칭송한다. 현모양처, 남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 자기의 능력을 포기하고 남성을 출세시키는 여성, 죽은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이 칭송을 받았고, 여성의 몸조차도 남성의 판타지가 반영된 앵두같은 입술에 불면 날아갈듯한 가냘픈 몸매라든지, 또는 굴곡미 넘치는 글레머 여성이 선호되었다. 이런 남성의 환타지는 여성에게 그대로 투영되어 종국에는 여성 스스로가 남성이 바라는 여성상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그 룰을 잘 따르면 훌륭한 여성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마녀가 되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 파란을 일으키는 주체적 여성은 악녀나 사회의 악으로 폄훼되었다.
여성들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남성들이 가르키는 달을 바라보면서 살아왔다. 그 달이 본질(보편의 진리)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이 남성과 발맞춰 나가야할 보편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의심없이 여성들도 남성이 가르키는 곳을 보았고, 봐야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들이 가르키는 달은 그들이 본 달이지 보편의 달이 아니었다. 보편적 진리가 아니었다. 서서히 여성들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3년쯤 전 바로 그 손가락의 주체가 누구인지 확연히 깨달았다. 세상의 보편적 진리라고 그곳을 바라보라고 가르치던 손가락은 모두 남성의 손가락이었다. 나는 마침내 세상이 나에게 감춘 비밀을 모두 알고 말았다. 중년이 되도록 내 마음이 이해가 안되고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내가 왜 그랬는지 안다. 그들이 본 달에는 생명력 넘치는 있는 그대로의 진짜 여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남성의 판타지만 가득한 그들의 세계에서는 여성은 장난감이자 수동적인 열등한 인간일 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그들이 걸어 놓은 주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이 가르키는 달을 봐야지 손가락은 중요하지 않다는 가르침 안에도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었다. 남성이 바라보는 진리의 세계가 보편적 진리이니 여성들이여 의심하지말고 남성을 따르라!는 역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내가 서두에서 언급한 두 남성학자의 여성에 대한 무시와 비열한 농담 속에는 아직도 자신들이 가리키는 달이 보편진리의 세계이니 손가락을 보지말고 달을 보라는 구태의연한 지식인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이 가리키는 달은 더 이상 보편진리의 세계도 아닐 뿐더러, 그럼에도 그것이 보편진리라고 여전히 주장한다면 이제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아야하는 것이다.
나는 “손가락과 달을 다 봐야한다.”는 박교수의 한마디가 참으로 시원했다. 박교수의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더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지금은 달을 가리키는 주체자가 굉장히 다양해져 있는 사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20세기까지만 해도 가부장제라는 문화의 토대가 워낙 완강하여 달을 가리키는 주체는 남성이었고, 그들이 가리키는 달이 보편적 진리의 세계였다. 전세계가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로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점차 남녀 평등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래야 한다는 것에 의견일치가 되었다. 그런 연유로 20세기 후반 부터 남과 여라는 두개의 대립구도가 개선이 되어가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해체되어가고 있다. 이 문제가 개선되어감과 동시에 각계 각층의 억눌려져 있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각자의 달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지금은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기 보다는 개별적 진리를 추구하는 다양성의 시대에 도달해 있다.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이라 했던가! 하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춰 천개, 만개가 되는 세상이다. 같은 달을 가리켜도 그들이 가리키는 달은 모두 다르다. 따라서 누군가 달을 가리키면 우리는 그의 달을 보는 것과 동시에 그 달을 가리킨 사람이 누구인지도 살펴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 예술에서 예술가들의 수 만큼 다양한 여성상과 남성상이 발현되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삼라만상이 발현되고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