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치도, 국내 정치도 전혀 관심 없었지만 코로나 이후 전 세계가 뒤숭숭하게 돌아가는 요즘, 내 마음도 편치가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현대에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사실 크고 작은 전쟁들이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었지만 코로나로 세계인이 정신이 없는 이 틈에 강대국이 작은 나라를 상대로 전쟁이라니. 게다가 대선이 끝난 국내 상황도 아슬아슬해 보여서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이런 시국에 관심을 안으로 돌려 중심을 잡아야겠다 싶어 책도 읽고, 여러 강의 영상도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나에게 여전히 최대의 관심은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물리학 강의를 듣다 보니 우주의 모든 것이 같은 원자를 구성 물질로 한다고 하고, 인간도 우주의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니 인간의 본모습을 알려면 우주도 알아야겠구나 싶다.
안 그래도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강의도 듣고, 최근에는 주역 공부도 시작했다.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주역을 공부해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왠지 나에게 주역은 너무 큰 산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공부 전에 맛보기로 기초적인 책부터 읽어 보고 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물리학과 주역의 원리가 너무도 닮아 있어 신기하고 흥미롭다. 우리의 몸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원자로 만들어졌고, 또한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원리가 상통한다 하니 우주와 자연을 알아야 인간이 이해가 되고, 인간을 파헤치면 인간 안에 우주와 자연의 섭리가 담겨있다니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공자님이 주역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 끊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는 말씀에 공감이 간다. (* 공자님이 가죽끈이 세 번이 끊어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고 하여 겁먹지 말자.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니 당시에는 죽간으로 묶은 책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요즘의 웬만한 책은 거듭 읽으면 찢어지거나 너덜너덜해지기는 해도 책을 묶은 끈이 끊어지는 일은 없지 않은가! ^^)
내가 읽은 초운 김승호 선생의 책 속에 "글이 말을 다 담지 못하고, 말은 생각을 다 담지 못하지만 괘상은 모든 것을 다 담는다."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세상의 원리를 64개의 괘상으로 목록화해낸 인류의 지적 능력이 대단함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주역은 과학이 발달 해갈수록 더욱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현대 과학이 이미 주역의 덕을 아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진법을 개발한 라이프니츠는 주역을 공부하며 그 안의 음양 원리에서 이진법의 힌트를 얻었다 하고,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는 주역을 끼고 살았다 한다. 1922년 닐스 보어가 노벨상을 받으러 나갈 때 8괘가 그려진 옷을 입었으며, 그의 가문 문장에 음양도가 들어가 있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고, 아인쉬타인이 타개한 날 그의 머리맡 테이블에 주역이 놓여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과학자들 뿐 아니라 "원형(Archetype)"이란 개념을 만들어 낸 칼 융도 주역에서 그 힌트를 얻었다 하니, 수천 년 전부터 인류는 범우주적 사고 체계를 가지고 우주와 자연 현상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해석하는 데까지도 두루 주역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인생사 덧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이 덧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모두 각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치를 스스로 찾아야 할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이미 굉장한 사건이고, 비록 티끌같이 작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살다가 우주로 돌아가지만,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우주를 품을 수도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주를 품을 수도 있을 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학문으로 현대의 다양한 과학 분야와 주역 공부가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굉장한 확률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하루하루 의미있게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의미란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가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하며 자기를 바라보는 일을 말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다양한 가치관을 주입받는다. 그런데 대개의 가치가 우리의 삶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버겁게 만든다.
하도 인생은 값어치 있게 살아야 한다고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인생에 진짜 거창한 가치가 있는 줄 알았다. 대단한 꿈을 갖고 성공적 삶을 향해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세상에서 명성을 얻고 거창하게 살고 있는 세계와 국내의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보니 하나도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그런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주입받은 성공에 대한 가치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생이 가치 있다느니, 가치 없다느니, 허무하다느니 하는 가치판단을 내려놓고 이제 세상을 직시하고 싶다. 이젠 이런 가치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입하려던 주체가 누구였는지 직시했고, 이제는 알기 때문에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동시에 그 허구성을 인식하면서 이제는 나답게,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현대 과학과 주역을 통해 우주와 자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이해를 더 심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과학과 주역은 상당히 닮아 있다. 따라서 과학을 통해 주역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주역을 통해 과학에서의 주장을 앞서 나아가며 인간을 탐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주역에는 여전히 문제가 좀 있어 보인다. 수천 년 전 세상이 가부장제로 변할 때 주역에도 가부장적 질서가 덧입혀져 음양의 원리를 남녀의 성의 차별로 이데올로기화하여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하였기에 음양을 남녀성의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고정시켜 놓았다.
인문학의 발달이 인간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틀을 제공하긴 했으나 문명이 발생한 이후 최근까지 인문학은 남성들의 가치관이 반영된 일방적인 인문학이었기에 지나치게 한쪽 성의 가치관에 치우쳐 있다. 주역도 예외가 아니다.
주역 연구자들이 주역의 탄생을 5천 년 전쯤이라고 보는 것 같은데, 그 시절은 중국에 아직 가부장제가 정립되기도 전이다. 중국은 은나라(BC 1600 ~ BC 1046) 중기에 가부장제가 서서히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모계사회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음과 양의 질서를 남성을 음으로, 여성을 양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중국에 가부장제가 정착하기 전 하늘신은 여와 여신이었다. 나중에 가부장제가 되며 복희씨의 아내로 자리가 좌천되었다. 이집트 신화에도 하늘신은 누트 여신이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이 여전히 주역의 괘상을 해석하면서 남녀의 성 고정적인 언사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주역이 과학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진짜 주역이 과학적이려면 그 안에 감춰진 이데올로기를 걷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김승호 주역 학자의 책을 여러 권 읽었고 앞으로는 다른 연구자의 주역 책을 읽겠지만, 나는 김승호의 책을 읽으며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는 젊은 시절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과학도로서 50년이 넘도록 주역을 연구한 결과 주역이 대단히 과학적이라고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그의 저작이 좋았다.
그런데 그의 여성관은 너무도 구태의연하다. 생물학의 발달과 DNA의 연구가 엄청나게 진척된 지금, 여전히 여성은 다소곳하고 수동적이며 갈대처럼 마음이 수시로 변하는 존재로 도처에서 수시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시각이다. 그는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도포된 주역을 설파하면서 주역은 대단히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니 나는 그의 한계에 많이 실망스럽다. 그 부분만 걷어내면 주역의 안내서로서 훌륭하지만 옥의 티가 옥의 가치를 무색케 해버린다.
그의 주장대로 주역이 지극히 과학적이려면 남성 중심의 고착화된 성에 대한 시각 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여성 폄훼적 표현들을 보고 있으면 연구자의 한계에 헛웃음이 난다. 앞으로 학자나 연구자들도 여성들의 비웃음을 받지 않도록 거듭 자기 생각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학자의 한계라고 봐주면서 책을 읽고 싶지는 않으니까.
* 내가 읽은 주역 안내서
(모두 "초운 김승호" 선생의 저작)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깨달음의 실천 편⟫
⟪새벽에 홀로 깨어 나를 만나는 명상인문학⟫
⟪운명을 넘어선다는 것 : 공자의 마지막 공부⟫
⟪옥영서 :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
위의 사진출처 : ko.wikipedia.org /en.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