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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Nov 17. 2024

#01 바할라 나 1화 _ 천 개의 눈

신의 뜻대로

그는 그저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밥 먹고, 잠자고, 기회가 있고 미래가 있는 곳으로.   

        

1.


빨강, 파랑, 노랑, 보라. 찌그러진 오색 풍선처럼 봉다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오색 풍선 안에는 드문드문 붉은 기가 도는 갈색의 맥주병이 나뒹굴었고, 그 속에서 반쯤 썩어가는 깔라만시 위로 구더기가 기어갔다.     


더러는 흙으로 바랜 노란 매직 사랍Magic Sarap과 검붉은 코피코KOPIKO 껍데기가 삐져나와 있었다. 잘록한 콜라병 가슴팍에는 내리쬐는 태양과는 어울리지 않게 북극곰이 웃어대고 어쩌다 빨간 벌이 되었는지 모를 졸리비Jollibee는 박스째 일그러져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마저도 어느 안락한 비닐에 들어가지 못한 오뚜기 3분 카레 박스와 빈 모구모구MOGUMOGU 플라스틱 병, 크노르Knorr 스프, 샛노란 레몬 주스 병과 덜 노란 스팸 캔 뚜껑은 찌그러진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것을 쓰레기의 멜팅팟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쓰레기마저 정체성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엔 원래 제 역할이 쓰레기가 아닌 것들도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어느 집 안방에 놓였을 텔레비전, 주방에 있었을 프라이팬,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소파의 잔해들이 쓰레기들 사이에서 같이 뒹굴었다.      


그 사이사이의 여백은 슬레이트 천장과 쓰러져 덩굴이 뒤엉킨 야자수가 메꾸고 있었다. 옛날 옛적, 필리핀의 어느 공주가 사랑한 남자의 잘린 머리를 심은 자리에 낫다는 코코넛은 진창에 굴러 마치 그녀가 끌어안고 울었던 그의 산발한 머리 같았다.      


필리핀의 항구도시 타끌로반,      

건질 것이 있는지 살피던 사람들마저 끊긴 절망의 땅에, 한 여자만이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있다. 꾸역거리며 꾸물거리는 구더기를 쪼아 먹는 갈매기 떼는 두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떠는 여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자의 머리 위로 뜨거운 손이 내려앉았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긴 하지만 빠르게 식어가는 손이었다. 여자는 흠칫 놀라 감았던 눈을 더 질끈 감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에 손을 가져가곤 신음같이 중얼거렸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소리는 크기도 속도도 일정하지 않았다.     


Ama… namin suma, sal…salangit ka, (아마… 나민 수마, 살… 살랑잇 까)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 아버지,     

Samanahin ang… ng ngalan mo. (사마나힌 앙… 응알란 모)

다… 당신의 이름을 경배합니다.      

Ma, Mapasaamin ang kaharian mo. (마파싸민 앙 카하리안 모) 

당신의 왕국이 우, 우리의 것이 되게 해 주세요.     

Sundin ang loob… (순딘 앙 룹…)

당신의 뜻이… 하늘에…  

   

그녀가 점점 더 빠르게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기도문을 외자 머리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그녀의 이마를 타고 눈으로 흘러 들어갔다. 순간, 그녀는 찡그리며 눈을 떴다. 따끔한 햇살과 붉은 물줄기가 그녀의 눈을 찌르는데도 동공은 점점 커졌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도끼를 든 천 개의 눈이었다.   


2.      


필리핀 루손 팜팡가주 앙헬레스의 한인 타운, 프렌드쉽Friendship의 게이트를 지나면 한글로 된 간판들이 늘어서 있다. 「청담동 오리장인」, 「고향 댁」, 「한샘 키친」, 「구이 화로」, 「소나무집」, 「대림모터스」, 「부산밀면」, 이런 식이다. 가게 이름들이 너무도 익숙해 잠깐, 여기가 필리핀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변두리라고 착각할 정도랄까.    

  

익숙한 글씨가 가득한 대로변을 지나 골목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으슥하고 후미진 곳에 널찍이 자리 잡은 「정원가든」이 있다.  말만 정원이고 가든인 곳이다. 메마른 땅에 듬성듬성 있는 깡통 테이블만이 이곳이 한국식 바비큐 집이란 걸 알려줄 뿐이었다.

      

이 집의 사장 장민수는 늘 간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ㅜ’와 ‘ㅓ’가 어긋맞아 정원의 ‘원’이 거슬렸다. ‘ㅜ ’ 위에 ‘ㅓ’가 있는 것이다. 간판은 민수가 이 가게를 인수할 때부터 그랬다. 간판 보고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으니 괜한 생돈 들이기가 싫어 뭉그적거리고 있지만 볼 때마다 쓴 입맛을 다셨다.      


썩을 것들. 글자 하나 제대로 못 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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