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뜻대로
턱턱 숨이 막히는 필리핀의 12월 밤에는 비도 한 점 오지 않았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는데 민수는 그저 빈 잔에 힘없이 소주를 들이부었다. 한식당 「청담동 오리 장인」은 손님들이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낮은 조명만이 깜박였다. 때에 젖은 벽에 붙은 전단지 속에서 수지가 밝게 웃고 있었다.
한 달.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수지가 있어 아름다웠던 세상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여섯 살 인생, 수지에게 나는 좋은 아버지였나. 사는 게 뭐라고… 왜 그랬을까.
어디 팔려가진 않았을까. 험한 꼴이나 당하지 않았나. 살았을까, 죽었을까… 어떻게 털끝만 한 단서하나 나오지 않나… 무엇을 더,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기숙은 초점을 잃은 민수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았다. 잔은 이미 넘쳐 상 아래 구겨 넣은 민수의 다리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기숙은 가만히 젓가락을 집어 바싹 타들어간 오리 한 점을 그의 그릇에 얹었다.
「천천히 마셔. 안주도 좀 먹어가면서. 속 버린다.」
민수는 술에 젖은 눈을 들었다. 그의 주위로 어두운 표정의 번영회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민수는 거친 콧김을 억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아… 씨. 다들 들어가라니까, 왜 안 가, 어? 전 이것만 마저 마시고 간다니까요.」
민수는 손을 뻗어 휘휘 내저었다. 휘휘 내젓는 손을 따라 흔들리는 그의 몸뚱이는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민수를 마주하고 앉은 성철은 와락 짜증을 냈다.
「니가 장사도 안 하고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다들 지 볼 일만 보냐?」
민수는 히죽 웃었다. 그 웃음에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이윽고 민수가 침을 튀겨가며 소리쳤다.
「찾아야죠. 우리 딸 찾으면 다 해결된다고! 우리 수지를 찾으면요, 장사도 잘될 거고 술은 입에도 안 댈 거라고, 내가!」
「알지, 알지. 우리 장 사장, 딸만 찾으면야…」
「그러니까, 형님. 그때까지 나는 무조건 멀쩡해야 해! 이까이 소주가 날 쓰러뜨릴 수는… 없는 거지, 암! 우리 수지가 날, 을마나 기다리는데!」
그건 주정이라기보단 기도에 가까워 보였다. 민수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한참 쥐고 있다가 한 입에 소주를 털어 넣았다.
번영회 회장이자, 그간 민수에게 공술을 제공했던 「청담동 오리 장인」의 사장 기숙이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녀는 소주병을 들어 민수의 빈 잔을 채웠다.
「민수야… 이제 그만하는 건 어떠냐?」
민수는 게즘게즘한 눈을 들어 기숙을 보았다. 그 눈에 열기가 감돌았다.
「뭘 그만둬요?」
「한 달이면 할 만큼 했어, 민수야. 여기 사람들도 언제까지 애 찾는 거에만 매달릴 순 없잖니.」
「그래서요?」
「안 그래도 근방에서 사람이 자꾸 없어진다고, 요새 여기 한인 타운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그래서…」
성철이 가벼운 한숨을 쉬고 끼어들었다.
「회장님도 참. 뭘 또 그렇게 돌려 말해, 답답하게. 한 마디로 여기 번영회 사람들도 빡세다 이거지, 뭐. 」
민수의 입이 절로 비뚤어졌다. 그는 테이블에 코를 박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제가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동안 감사했고! 앞으로는 제발 신경 쓰지들 마시고 좀 가쇼!」
「뭔 말을 또 그렇게 하냐. 거, 너도 인제 니 인생 살아야지… 니 핏줄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애 가지고…」
「아, 씨바―알!」
민수는 테이블 위를 거칠게 쓸어버렸다. 그대로 상을 기어올라 마주 앉아있던 성철의 멱살을 잡아 방향을 잃고 뒤흔들었다.
「내가 한 번만, 한 번만 더 가족 건드리면 죽인다고 했냐 안 했냐.」
성철은 몸부림치면서 민수를 떼어놓으려고 애를 썼다. 다른 번영회 사람들도 민수를 만류하며 둘을 떼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성철의 멱살을 꼬나 쥔 민수의 손아귀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이, 이거 완전 또라이네.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이거 놔, 이 상놈의 새끼야. 이거 놓으라고!」
「가만가만 형님, 형님 해 쌌더니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병신 같은 게… 어디, 씨발, 수지를…」
「이러시지 마시고 놓고 얘기하세요, 형님들…」
「아오, 좀! 왜 이래 들…」
성철의 손가락이 민수의 코고 눈이고 할 거 없이 찌르며 밀어내도 민수는 꿈쩍하지 않았다. 술기운에 고통을 잊은 민수는 성철의 턱을 붙들고 부술 듯이 힘을 주었다. 성철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때, 기숙이 빈 소주병을 테이블에 내리쳤다.
차앙!
차앙, 차앙!
기숙은 말없이 계속해서 소주병을 내리쳤다. 그제야 민수가 손아귀의 힘을 풀고 기숙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뜯어말리는 소리, 비명 소리가 멈췄다. 민수는 풀린 눈으로 초점 없이 기숙을 한참 보았다. 그러더니 성철의 멱살을 놓으며 뒤로 밀쳐 버렸다. 바닥에 자빠진 성철은 씩씩거리며 민수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민수는 거친 콧김만 내뱉을 뿐,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민수가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움직이자, 성철이 움찔했다. 그를 뜯어말리던 번영회 사람들도 뒤로 물러서며 길을 텄다.
「이다윗. 가자.」
그때까지 민수를 뜯어말리지도, 돕지도 않고 한쪽에 물러나 있던 다윗이 민수를 조용히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