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파묘」 후기
1:01:04 지점의 그 책이 준 영감.
by 아노 Art Nomad Nov 25. 2024
「파묘」는 사람들에게 받은 영화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 작품이었다.
장재현 감독의 「사바하」를 좋아해서 기대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흥행하는 바람에 보기 주저하게 되는 영화이기도 했다.
나는 한때 배우였고 지금은 작가이다.
못난 마음에, 잘 되는 작품을 마주할 때면 치솟는 열등감과 동경이 뒤엉켜 며칠이고 힘들다. 하지만 언제나 호기심이 열등감과 동경을 이긴다.
영화 속 등장인물을 1인칭 주인공 삼아 글 쓰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로, 영화를 볼 때마다 어떤 캐릭터를 주인공 삼을지 고민하며 보게 된다. 때로는 집중에 방해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열등감에 빠질 새가 없어 좋다. A라는 딴생각이 B라는 딴생각을 이겨버린 건데 그래도 자기 파괴적인 B보다는 생산성 있는 A 딴생각이 낫다며 나를 위로하곤 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을 1인칭 주인공 삼아 글을 쓰려면 영화를 한 번 봐서는 감이 잘 안 온다. 파묘는 특히 여러 번 봐도 누구를 주인공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영화였다. 장의사인 고영근은 실제 모티프가 있는 캐릭터이고, 동티 난 창민이는 정보가 부족했다. 충청도 귀신, 경상도 귀신을 모시는 무속인들을 주인공으로 하기엔 내 무속에 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극 중 발 있는 빗자루 귀신이 흥미로웠으나 일본 무속은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조셉의 간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특히 그녀가 병실에서 잠들었을 때, 안고 있던 책이 궁금했다. 눈이 깊은 아이가 묘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푸른 표지. 1:01:04 지점의 그 책. 표지 윗면에 쓰인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서 출간된 책을 차례로 확인하다가 그 책이 바로 『별을 헤아리며Number the Stars』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근처 공공도서관 도서 목록에 검색해 봤고, 다행히 있었다.
『별을 헤아리며Number the Stars』를 읽고부터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별을 헤아리며Number the Stars』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있던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유대인 가족의 탈출을 도운 앤마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친일파 집안의 아이를 보호하는 간호사가 유대인 가족의 탈출을 돕는 이야기를 읽는다는 설정이 어쩐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떻게 살아왔고, 평상시 어떤 생각을 하는 인물일까? 상상이 시작되었다.
쓰다 보니 살면서 스쳐간 여러 호기심들이 이 인물에 녹아내렸다.
전전두엽과 측두엽, 해마 같은 것들은 SF 소설을 쓰면서 뇌과학에 대해 공부했던 시절의 흔적이다.
K-드라마 팬이라는 설정은 201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북미에 사는 백인 중년 여성 드라마 제작자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Filmmakers에 북미에서 재벌 2세 로맨스 한국 드라마를 제작할 예정인데 한국인 스크립터를 찾는다며 공고를 올렸었다. 당시에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미국과 캐나다에 재벌 2세 로맨스물의 수요가 있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했었다. 직접 만나 본 그녀와 그녀의 딸은 당대의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그때 얘기 해줬던 드라마 시놉시스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킹덤」을 앞세운 K-드라마가 북미를 강타했다. 레딧Reddit과 유튜브가 난리가 났다. 이때부터 나는 K-드라마 리액션 영상을 자주 챙겨봤다. 드라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국 역사에 대해 공부한다거나, 한국 문화, 한국어를 공부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인 세계사를 배운다. (세계사라 해도 주로 서유럽사, 미국사, 중국사를 주로 배우니 정말 세계의 모든 역사를 커버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가 세계사를 학습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지극히 한국적이듯이 미국인이 한국사를 학습하고 해석하는 방식도 지극히 미국적이지 않을까? 이 발상이 이 글을 쓰는 데 적지 않은 즐거움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을 꼽으라면 마지막 줄이라고 하겠다. 이 글이 어디에 실린 인터뷰인지 상상했던 순간이 가장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