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코가 석 자 지만 그래도.
최근에 반려 가족인 리트리버가 아팠다. 8일을 입원했고 지금도 치료 중이다.
대형견 치료에는 상당한 병원비가 들어간다. 퇴원 일주일 차인 리트리버 친구는 힘겨운 입원 생활을 잘 이겨내고 지금 펄쩍펄쩍 뛰어다니지만, 남은 평생 처방식을 먹어야 할 운명에 놓였다.
나는 원래도 우울한 성격이지만 근래에 리트리버를 입원시키고 지낸 8일만큼 우울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통장은 두 달 남짓밖에 버티지 못할 처지였다. (본래는 여섯 달쯤 버틸수 있는 현금이 있었다. 아껴쓰면서 그 안에 새 작업을 찾으려 했다.) 프리랜서는 대출이 워낙 어려운 데다 가계 대출 규제로 인해 소액 대출도 대체로 막혔다. 하필이면 최근 계약이 연달아 3개 엎어졌다. 주택 담보 대출 상환을 유예해야 하고, 적금을 깨야 한다. 여차하면 이사까지 할 판이다.
무엇보다… 어쩌면 이 친구와 이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나의 반려, 리트리버는 내가 가장 극한의 공황에 빠졌을 때 내게 와서 벌써 8년 가까이 곁을 지켜준 아이다.
그런데… 망할 때 망하더라도 빌어먹을 이「바할라 나」를 꼭 끝까지 쓰고, 어딘가에 공개하고 싶었다. 사실 다시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이 글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바할라 나」를 연재하면서 다시 의욕이 생겼다.
나는 2014년 가을, 약 한 달 보름동안 필리핀 앙헬레스에 있었다. 그때 빈민가 봉사도 다녀온 적 있다.
이 글은 그해 겨울부터 시작되었다.
2015년 3월까지 쓰고 접어뒀다.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지라 당시에는 의욕만 넘치고 전달력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범죄, 블랙 코미디, 오피스물이었다.
이듬해 말부턴 글쓰기에 회의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2019년 새 웹툰을 기획하면서 그간 써왔던 글, 모았던 자료들을 훑어봤다. 2015년의 글에 약간의 윤색을 가했지만 여전히 범죄, 블랙 코미디, 오피스물이었다. 흥미는 있지만, 필리핀 배경인 것이 독자들에게 직관적으로 다가가지 않을 것 같다는 지적이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내 필력이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 웹툰 기획은 완전히 다른 장르인 아이돌물이 통과되었다.
2021년 ‘안전가옥 X 메가박스 플러스엠’이 내놓은 호러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작품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공모 주제는 휴가, 포비아, 증강현실, 쓰레기, 밀실로 이 중에 1개 이상의 키워드가 꼭 들어가야 했다.
그 무렵 나는 뒤늦게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에 관심이 생겼고 한참 에드거 앨런 포, 셜록 홈스, 애거서 크리스티, 스티븐 킹 사이에서 헤매고 다녔다. 그런 퀭한 눈으로 써놨던 글을 보자 탐탁지 않았다. 내가 이 소재를 정말 오피스물로 만들려던 게 맞던가. 자문해봤다. 이때, 여전히 2015년 버전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글을 2개로 나누었다. ‘다윗’과 ‘데이비드’로. 이 중 ‘다윗’이 지금의 「바할라 나」다. 분할 한 두 작품 모두 ‘안전가옥 X 메가박스 플러스엠’ 호러 공모전에 제출했고 모두 떨어졌다.
이때부터 나의 미쳐버린 집착이 시작된다.
‘다윗’이었을 때도 이미 V5까지 퇴고했다. 「바할라 나」로 바통을 이어받은 뒤에는 V17까지 퇴고했다. 이번에 브런치스토리에 연재한 버전은 V17과 또 조금 다르다. 한글로 작성해 두었던 걸 업로드하면서 다시 퇴고하고 윤색했다. V18인 셈이다.
V1부터 V18 사이에는 카카오 판형으로 수정해 본 적도 있다.
2021년 ‘브릿 G’에 업로드했고 3명이 사서 읽었다.
2022년 ‘창작의 날씨’에도 업로드했다. ‘창작의 날씨’ 버전은 6화로 분할하였고 총 70명이 보았다.
그 사이, 드라마 「카지노」가 나왔다. 필리핀 배경의 K- 드라마가 히트했으니 조금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희망이 생겼다.
「바할라 나」와 분리했던 다른 작품을 교차편집해서 ‘2023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괴담 기획 개발 캠프’에 기획서와 시나리오를 제출했다. 다시 또 떨어졌다.
정말 드럽게도 못 쓰는구나. 누구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이제 소설에 대한 미련은 버려야 하나보다. 웹소설 웹툰화 각색이라도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살 수 있는 것에 만족하자… 등등. 자괴감이 땅을 파고 들었다.
그런데도 뭔가 이 작품과의 연이 끝난 거 같지가 않았다. 이제 어느 공모전에 제출하든 말든 상관없어졌다. 요즘 단편이 규격이 16000자 이하가 많다는 데 이 글은 점점 더 길어졌다.
올봄, 독립서점 「삼요소」에서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 과제로 이 작품을 제출했다. 이때가 V16이었다. 모임원들의 감상평을 듣고 나서야 왜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제야 플롯에 신경 쓰느라 주인공의 정서를 간과한 부분들이 보였다.
글쓰기 모임에 제출했을 때,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꺼내보는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이 어딘지 깨달았고, 고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다시 또 신경 쓰였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이 작품을 브런치스토리에 연재하기로 결심한 덕에 폴더에 잠들어 있던 다른 작품들도 브런치스토리에 공개할 마음이 생겼다.
무엇보다 이번 연재 버전이 꽤 마음에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과 함께한 지난 시간이 아깝지 않다.
과정은 그렇다 치고 그럼 왜 이런 소재를 택했나?
대한민국 경제 순위는 2024년 기준 전세계 12위이다.
전세계에는 나라가 몇 개나 될까? 유엔을 기준으로하면 회원국 193개, 옵서버 국가 등이 6개, 미승인 국가 7개를 합치면 206개 정도 된다고 한다. 이 중에 12위. 상당히 잘 산다.
잘 사는 만큼 사회 의식도 성장하고 있나?
그건 잘 모르겠다.
한국인은 정도 정의감도 넘친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반도 국가인데다가 남북으로 갈라져 섬처럼 살고 있는 현재 우리의 사회의식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미국에게 국제 경찰 노릇을 종용하고 일본에게 진실된 사과를 요구하지만 대한민국이 낳은 슬픔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때 조선족이, 조선족이 많이 사는 대림 일대가 마의 근원처럼 콘텐츠에서 다뤄진 적이 있다. 해당 콘텐츠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면만 보는 사회 의식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족 범죄자들이나, 코피노나 모두 짓밟히면 들이받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는 않을까?
지금의 대한민국이 조선족, 필리핀 노동자들 아니면 굴러가기는 하는 것일까?
기만은 언제나 유혈사태를 낳는다. 그런 꼴을 필리핀 앙헬레스의 쓰레기 마을과 발리바고에서 보았다.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혹시 내 얼굴도 기만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 역시 위기이다. 경제대국이니 어쩌니 하지만 요즘 서민경제 정말 빠르게 무너지는 건 아닐까 무섭다. 주변의 자영업 가게들이 속속 문을 닫았다. 나는 저가형 커피 한 잔조차 마시기 겁나서 발을 몇 번이나 돌린다. 그러니 어쩌면, 코피노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눈총도 받을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머리는 자꾸 이런 작품으로만 굴러간다.
언젠가… 그럼에도 쓰기를 잘 했다고, 내가 보고 듣고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한 거라고, 어떤 기만을 당하거나 목격했는데 그때 내 글이 생각났다고 하는 독자가 있었노라고, 나를 위로할 날이 있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