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제대로 나온 신작)」후기

이런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어서.

by 아노 Art Nomad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 속 등장인물 중 하나를 골라 그 또는 그녀를 1인칭 주인공 삼아 짧은 소설 쓰기’ 프로젝트를 막 시작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영화 추천을 받은 적 있다.


그때 딱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어떤 시대, 어떤 나라의, 어떤 장르 영화도 상관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등장인물의 성별, 연령대, 직업, 관계, 갈등이 다양한 영화면 좋겠다는 것.


그러자 신기하게도 가족에 관한 영화를 엄청 많이 추천받았다.


지금까지 올린 네 편의 영화 중 세 편은 가족 영화다. 「파묘」도 전반부는 따지고 보면 가족에 관한 이야기니까.


지인들에게 위 조건에 해당하는 영화들을 추천받은 걸 주욱 정리해 보고서야 알았다.


가족만큼 성별, 연령대, 직업군이 다양한 집단도 없구나. 그러니 갈등이 끊이질 않겠다.


이 영화는 정말 거슬렸다.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데 한 식탁에 모여 앉아 있어야 하는 불편함. 너무 익숙한데 뭐라 꼬집어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불쾌함. 그게 마치 뇌에 막이 하나 끼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계약서처럼 정확하지 않고, 수학처럼 딱 떨어지지 않으며, 논증처럼 명쾌하지도 않은 상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아무리 ‘그건 쟤네나 저렇지, 우리 가족은 안 그래!’ 하고 큰소리를 쳐도 이 두 시간 분량의 갈등 중에 적어도 한두 가지는 내심 ‘우리 가족 같아.’하고 뜨끔했을 거라 생각한다.


마이어로위츠 가 사람들은 서로를 관찰하지 않거나, 관찰하기를 포기했거나, 지쳤다.


반은 듣고 반은 듣지 않으면서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들을 수십 년간 얼굴 맞대고 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이라서.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가족이 앞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응원은 가족 구성원을 완성시키고 가족의 멸시는 가족 구성원을 서서히 좀 먹는다.


우라질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갑자기 끈끈해지고,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그 시간은 대체로 짧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관계의 끈은 끊어지지 않는다. 역시, 가족이라서?


미디어가 보여주는 가족 판타지에 젖어 산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주 단순하고, 내가 늘 갈구했으면서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


‘어쩌면 가족은 형성보다 유지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다.


일단 가족이 되기로 했다면, 둘이 만나고 아이가 생기고 할 때까지는 신났을 게 아닌가.


마이어로위츠 가 사람들은 서로를 질려하면서도 계속 되짚는다.


어떤 계기가 이 가족을(우리를) 이토록 무기력하게 만들었을까?


마이어로위츠 가 사람들은 상대의 반응이 그들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을 게 뻔한데도 무던히 노력한다.


아버지 해롤드 마이어로위츠가 갑작스레 입원했을 때 잠깐 끈끈해지는가 싶더니, 아버지 해롤드는 퇴원 후에도 여전히 말이 안 통하고 참다못한 대니는 결국 쿠키 접시를 엎어 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이 장면을 얘기할 것 같다.


그나저나 보긴 다 봤는데 「아메리칸 뷰티」 때처럼 영화에서 얻은 힌트만으로 정면승부를 내기엔 어려웠다. 어쨌든 이 가족은 파국은 아니니까.


영화의 외적인 부분에 대해 알아보다가 「옥자」와 같은 해 칸 영화제에 출품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속 손녀, 일라이자 마이어로위츠가 하필이면 영화과 새내기 역이었다. 순전히 얻어걸렸지만 나쁘지 않은 조합이라 생각했다. (유튜브에서 2017년 6월 29일에 있었던 서울극장 GV 녹화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 칸에서「옥자」 팀이 「마이어로위츠 이야기(제대로 나온 신작)」팀과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고 한다.)


더구나 이 가족 중에 이런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일라이자가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가족끼리 할 말이 있는데 진짜 말하고 싶은 화두가 무거우면 꼭 가벼운 딴 얘기부터 서두를 조금 끌 듯이, 일라이자의 편지도 그렇게 시작해 봤다.


해롤드는 이 편지를 읽을 것이고, 분명 다른 구성원에게도 자랑도 할 것이다. 일라이자가 칸까지 가서 이 할아비(이 해롤드)를 생각하고 편지했다고. 그것도 손글씨로.


그러면 서로 이건 내 얘기, 저건 네 얘기하면서 조금 웃고 조금 자신을 돌아보며 한동안 잠잠할 것이다. 적어도 이 편지를 모두가 돌려보는 동안까지는.


그리고 모두 잊고 다시 또 싸우다 아마 해롤드의 숨이 멎어가는 날, 다시 이 편지 이야기를 꺼내겠지.


이 영화는 그런 게 가족이라고 말하는 거 같아서, 그리 색다를 건 없지만 있을 법한 ‘할아버지께 편지 쓰기’를 소재로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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