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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노 Art Nomad Dec 16. 2024

#11 가노파 ①

『브리태니커』"가노파" (1998)

사진 출처 : 가노파 1대, 가노 마사노부 _「주무숙 애련도(周茂叔 愛蓮圖)」

*주무숙(중국 북송시대 유학자)이 연꽃을 흠모하다.

https://collection.kyuhaku.jp/advanced/7946.html


* 저는 브리태니커 사전을 읽으며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했고 이미 제가 알고 있던 사실이나, 제가 본 콘텐츠, 제가 작품을 쓰려 조사했던 정보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했어요. 이하는 백과사전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고 그에 대한 저의 경험이나 생각, 읽어봤거나 검색한 것 등을 정리한 것입니다. 부담 없이 읽으시면 좋겠네요.  


* 혹시나 오류를 발견하셨다면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브리태니커』"가노파" (1998)


가노파 


15~19세기에 일본에 발전한 회화 유파. 7대 200여 년 간 일본 미술계를 풍미한 화가들을 배출했으며 그 뒤에도 몇 세기 동안 일본 화단을 주도했다. 줄곧 쇼군들을 섬겼는데, 이 파의 전통인 고상하고 도덕적인 상징주의는 정치적 이상이기도 했다.      


브리태니커의 한쪽 반 정도 분량이 모두 이 가노파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하다. 가노는 성씨이다. 다시 말해 '가노 가(家)' 7대(이상)가 한 화풍에서 시작해 그걸 발전시켜 한 유파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이 부분이 놀랍고도 부러웠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대를 이어 직업화가였던 집안이 있었나? 그에 관해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아마도 없었을 것 같다. 


이 부분은 당시 사회 구조적인 차이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당시 우리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인 왕조시대이고, 일본은 바쿠후(幕府 막부) 별로 세력이 나누어져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화가들은 주로 하나의 왕에게 바치기 위한 그림을 주로 그렸고 일본의 화가들은 부와 명예 경쟁을 하는 여러 막부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다. 


왕을 위한 그림은 헌정이다. 다시 말해 왕을 위한 그림에는 개개인의 이름이 남지 않고 돈도 남지 않는다. 따라 생계가 유지되지 않고 화가로 명성을 떨칠 수도 없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조선에는 직업화가보다 문인화가가 많았을 것이다. 그저 취미로 그리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 _ "조선통신사 답례품 그림 <부용안도(芙蓉雁圖) 병풍>"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09445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7년에서 1811년까지 12차례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입니다. 이들은 문화사절로서의 성격이 강해 문예에 능한 인물들이 반드시 동행하였는데 도화서(圖畫署) 출신의 화원도 반드시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의 본래 업무는 일본의 주요 광경 및 행사 등을 그리는 것이었지만, 그 밖에도 조선 화원의 그림을 얻어가려고 몰려든 일본인들의 요청에 부응하느라 밤낮없이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위 기사를 보면 어진을 비롯해 공적인 용도인 그림을 그리는 관청, 도화서(圖畵署) 화원들의 그림을 일본인들이 얻어가려고 몰려들어 화원들이 밤낮없이 그렸다는 데 지금까지 이름을 날린 화원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반면 세력가를 위한 그림은 명성과 부를 낳는다. 세력가가 과시욕이 강할수록 더욱 큰 명성과 부를 낳고 이 명성과 부가 대대손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그림 수익이 높기 때문에 그림만 그리면 된다. 새로운 화풍을 시도한다던가, 비단에 금박을 두르고 그 위에 채색을 하는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다 그림으로 수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다. 


그러니 300여 년 동안 그림만 파고든 가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초기에는 특정 막부를 위해 그림을 그렸던 가노파는 점차 여러 쇼군과 황궁의 의뢰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적자에게만 유파의 대를 잇게 것도 아니다. 실력이 있다 싶은 사람은 양자로 들이기도 했다. 


가노파는 일본에 중국 문물이 활개치고 있을 때 등장했는데, 일본 수묵화도 당시 꽤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가노파의 양식은 주제나 수묵기법면에서는 중국풍이었지만 표현양식에서는 철저히 일본풍이었다. (중략) 병풍과 미닫이 문에 그린 그림에서는 외양의 중요성과 단조로운 장식 처리가 강조되었다.  


고려부터 조선 시대의 동북아 3국의 사상, 문화적 흐름이 중국에서 한국,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간 것이 많다 보니 가노파 태동기 그림은 중국풍 기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하의 가노파 인물에 대한 정보는 원래 가나다 순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해를 돕고자 1대, 2대 … 순으로 정리하였다. 


가노 마사노부      


일본 아시카가 바쿠후의 어용화가. 300여 년간 일본화된 중국화법으로 일본 화단을 이끈 가노파의 시조이다.      

「주무숙 애련도(周茂叔 愛蓮圖)」 _ 가노 마사노부의 사애도(四愛圖) 중 하나 출처: https://collection.kyuhaku.jp/advanced/7946.html  

                            

승려화가 덴쇼 슈분에게 영향을 받아 중국풍의 수묵화를 그렸다. 그러나 슈분과는 달리 승려가 아니었던 그는 선종의 신비주의를 나타내는 희미한 테두리 선과 옅은 붓칠 대신 일본 고유의 보다 세밀한 화법으로 형상을 묘사했다.     


가노파는 이 가노 마사노부 덕분에 이후 300여 년을 먹고살게 된다. 보기엔 산수를 표현한 일반적인 수묵화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 데 어떤 점이 한 유파를 세우게 한 것일까. 궁금해서 다른 자료도 찾아보았다. 


위키백과_ "일본의 미술"

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EC%9D%98_%EB%AF%B8%EC%88%A0


수묵화의 장식적인 용도로서의 이용에 있어서 충분히 수묵화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그 위에 장식효과도 가해서 새로운 장식으로서의 회화를 만들어 낸 것은 가노파(狩野派)였다. 단순한 화면을 가진 수묵화와 장식성은 모순된 것으로 보이지만, 가노파의 시조로 알려진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1434∼1530)의 아들인 모토노부(元信, 1476∼1559)는 수묵화의 묘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충분한 장식효과를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위에서 언급되었듯 수묵화는 묵직하고도 단순하다. 여백의 미, 비어 있음이 주는 아름다움이 바로 수묵화 아닌가. 그런데 그런 수묵화로 장식의 미를 살렸다는 건 어딘가 모순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모순을 해결해 온 것이 바로 가노파라고 한다. 


읽기만 해서는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앞으로 첨부할 사진들을 보고 그 감수성이 어떤 것인지 나도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가노 모토노부 


가노파의 시조인 아버지 마사노부에 이어 아시카가 바쿠후의 어용화가로서 아시카가 가문이 선호하던 중국풍의 수묵화 기법을 계승했다. 


「사계화조도」_ 가노 모토노부


브리태니커에는 위 작품이 교토 레이운인(靈雲院 영운원)의 미닫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는 이름이 바뀐 건지 블로그 글에서 교토 다이토쿠지(大德寺 대덕사) 다이센인(大仙院 대선원)의 미닫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출처] 『교토(京都)의 사적탐방(史蹟探訪)』 14 - [대덕사(大德寺)의 탑두사원(塔頭寺院)들Ⅱ] -▣방춘원(芳春院)▣고동원(高桐院)▣대선원(大仙院)▣서봉원(瑞峯院)▣용원원(龍源院)|작성자 ohyh45


아버지 가노 마사노부처럼 중국풍의 수묵산수화에 일본풍 세밀한 묘사를 더 한 것뿐 아니라 흰색, 빨간, 초록색의 세 가지 색이 더해진 것이 돋보인다.  


일본 고유의 야마토에를 전문적으로 그린 도사파(土佐派)의 창시자 도사 미쓰노부의 양자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적인 수묵화의 힘찬 필치와 야마토에(大和繪)의 장식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다.       

야마토에란 뭘까? 


위키백과_"야마토에"

https://ko.wikipedia.org/wiki/%EC%95%BC%EB%A7%88%ED%86%A0%EC%97%90


야마토에는 헤이안 시대에 비롯되어 제재, 수법이 일본풍인 그림을 말한다. 


9세기 중엽부터 비로소 일본의 산수나 풍속을 섬세하고 우미하게 그린 야마토에가 생성, 완성되었다. 야마토에의 특색은 주로 장병화(障倂畵)·두루마리·초상화 등에서 발휘되었다. 


그럼 장병화(障倂畵)란 또 무언가?

 

월간미술_ "장벽화"

https://monthlyart.com/encyclopedia/%EC%9E%A5%EB%B2%BD%ED%99%94/


장벽화 障壁畵 

일본의 성이나 사찰 또는 귀족들의 대규모 주거건물의 내부를 칸막이하는 데 사용한 후스마 문이나 병풍 등에 그린 그림. 일명 '장병화 (障倂畵)'라고도 한다. 


정보를 종합해 보자면 가노 모토노부의 시절에 도사파는 지는 해, 가노파는 뜨는 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노 모토노부가 도사파의 양자로 있으면서 익혔던 야마토에의 기법을 가노파의 수묵화에 접목해 발전시켰다는 말이 된다. 


세 가지 색을 더한 수묵화를 칸막이 문 위에 그리다. 


어떤가? 사진을 보고 나니 수묵화와 장식의 모순이 좀 해결되셨으려나? 


#12 가노파 ②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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