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작가와 시간의 뜰
일부러 특정한 작가의 전시를 보기 위해 어떤 공간을 들어선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목적이 있거나. 직접 그 그림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이지 않을까? 이영주 작가의 그림을 찬찬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그림의 본성. 작가의 시각과 기량. 담아낸 시간. 순발력과 재치 모두에 약간 항복해야 하는 기분이 든다. 그만큼 작가의 그림에는 다양한 측면이 녹아들어 있다. 분명 이영주 작가는 서사나 어떤 대상과 함께 멱살을 움켜쥐고 싸우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주도면밀하게 아무런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림의 본성에 관해, 아니 보이는 것들에 관한 명확지 않은 감정에 관해 분명한 언급들을 하고 있다.
그림의 순간이 지니는 빛, 담기는 감정, 색채는 형상을 이루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세계를 건드린다. 이영주 작가의 작업은 이들의 경계를 교묘히 흐리며 관람자로 하여금 낯설면서도 익숙한 심리적 풍경 속으로 끌어들인다. 초록빛이 뒤덮인 화면 위에서 나른히 걸쳐 있는 선들, 그 위를 가로지르는 생명체들은 특정한 내러티브를 지니지 않는다. 아무런 목적성을 띄지 않을뿐더러 무언가의 상징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대상들이 지닌 표정들을 통해 다양한 감정들을 촉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빛의 굴절, 색채의 농도, 미묘하게 흐르는 그림자의 결은 우리의 시각적 경험뿐 아니라 내면의 감각을 깨우며, 그리움이나 희망, 혹은 알 수 없는 상실감 같은 지난한 정서의 파편들을 끌어올려 준다.
추상에서부터 극 사실적 표현법 모두에 걸쳐있는 작가의 보는 방식들. 어쩌면 색채와 주관적인 감정과 대상들의 변화들을 따라갔던 인상주의자들의 전통과 어느 정도 닿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시기 작가들은 빛과 움직임들이 우리에게 선사했던 음악과 리듬, 당대의 시절이 주던 낙관적인 음악적인 역동성과 함께 어우러 지곤 했다. 반면에 이영주 작가의 그림들은 '사실'들이 지니는 알 수 없는 공허감. 텅 빈 지시의 세계를 아울러 전달해 준다. 그래서 그림들은 어떠한 그림 속에 작가 스스로 그려놓은 대로 '창문'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 그 대상들의 익숙함 만큼이나 우리에겐 묘한 기시감을 주는 낯섬들은 꿈속 연상들과 큰 차별 없이 조화롭게 낮잠속 미몽들로 연결해 주는 감각들을 살려낸다.
이 감각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어떤 질서 속에서 작동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거나 해석하려는 순간 그림은 다시 침묵한다. 결국 관람자로 하여금 다시금 느끼도록, 그것도 조용하게 아주 천천히 느끼도록 만든다. 오히려 이 그림들의 미덕은 되려 창문의 바깥의 어지러운 소음들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입하는 해석의 세계들에 이르기까지 올바르게 화해하도록 우리에게 권유하는 데에 있다. 그 그림 속에는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변증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 속에 현대사회의 상징에 관해 많은 지시를 하지 않고 있다는 불평들은 그다지 온당치 못하다.
이영주 작가의 그림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시선과 감정을 통해 새로운 차원이나 감각을 끊임없이 되돌려 보게 하는 힘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아마도 이 그림 앞에서 우리가 ‘직접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심정이 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정적이지만 은근한 울림을 내게 주던 속삭임이 결국 우리가 가진 감각의 근원, 혹은 알고 보면 누군가의 그림이었던 '현실세계'의 숨겨진 비밀들에 관해 듣고 싶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 어느날 오후, 낮잠을 자며 얼핏 보았던 그 뜰안의 사물들과 정말 사실이라고 믿었던 그 창문들 너머의 시간들. 그곳에 아직은 발견되지 않은 기쁨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한번쯤 믿어 보고 싶다는 그 낙관의 빛들이 비치던 창문들 말이다.
이영주 작가는 부산태생으로 한결같은 전업작가로서 활동을 이어나가는 작가이다. 그림을 가르치거나 전시회를 꾸준하게 가지면서도 정작 자신은 작가를 제대로 이어나갈 활동 역량이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영낙없이 작가인 시선과 기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면서도 속도전에 휘말리고 있는 미술 영역의 발전(?)에 두려운 눈빛을 지닌 분명한 직업적인 작가이다. 오히려 가장 현실에 부합하는 그림, 현실과 맞닿아 있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물처럼 선사하면서도 사람 자체가 지닌 꾸준함과 한결같음이 배여 있는 그림들을 가끔 전시회에서 보는 시간들이 위안처럼 다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