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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괜찮은데, 사람들이 별로이다?

지성인일 수록 불편한 배타적 기독교는 안녕하실까?  

by 김현명 Mar 20. 2025

기독교는 괜찮은데 사람들이 별로라면? 


얼마 전, 한 지성인인 한 교육기획자가 기독교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논지는 명확했고, 증거는 빼곡했다. 듣는 내내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비판이 너무도 체계적이고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교를 변호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을 실천하는 이들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적 체계로만 바라보려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철학이나 사상적 전통이 아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계시의 종교다. 인간이 신을 탐구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라, 신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기독교의 가르침은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윤리는 때때로 모순적이거나 불합리하게 보일 수 있다. 출발선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유화, 200x185cm, 1305년, 스크로베니 예배당 (아레나 예배당)


예를 들어본다면 현대 사회는 인간을 중심에 둔다.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 선택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기독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자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그것은 신의 뜻과 섭리다. 그리고 그 섭리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발견한다고 기독교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기독교가 억압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기독교는 ‘자기 부인’과 ‘순종’을 말하며, 자아실현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 현대 문화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히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진정한 자유로 초대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자유는 현대적 의미의 자율성과 다르다. 같은 말이지만 다른 맥락에서 사용된다. 그건 자기 욕망에 충실한 상태가 아니라, 신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것'이다.

 

배타성과 포용의 역설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비판도 자주 제기된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다른 종교적 전통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기독교는 가장 배타적인 동시에 가장 포괄적인 종교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는 모든 사람을 초대하셨다. 그의 부름에는 인종, 계층, 성별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초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응답하는 자들에게는 변화가 요구된다. 신앙이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있는 모습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포용을 말한다. 그러나 포용은 단순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 사랑은 상대를 향한 무조건적 인정이 아니라, 그 존재를 변화시키는 초대다. 기독교가 시대와 갈등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세상은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수용을 원하지만, 기독교는 변화를 요구하는 사랑을 말한다.


기독교가 변방으로 밀려난 시대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는 점점 더 소수파가 되어가고 있다. 한때 교회가 문화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것을 기독교의 쇠퇴로 본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래 권력의 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언제나 변방에서 시작되었고, 힘이 아니라 희생으로 확장되었다. 초대 교회는 로마 제국의 중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갈릴리 어부들과 세리, 여성들과 병자들, 사회적 약자들이 복음을 들었고, 그들로 인해 신앙이 퍼져나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기독교는 권력과 결합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래적 형태는 아니었다. 어쩌면 오늘날 기독교가 다시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것은, 신앙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나는 스페인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남녀 화장실이 사라지고 있었다. 다원주의적인 세상은 숱한 경계선들을 허물어 가고 있다. 단순히 희미해져 가는 가는 것 뿐만 아니라, 기술체계. 빅데이터와 함께 모든 것들을 선택해야만 하는 더 강하고 신적 차원의 인간형을 무한하게 확장시켜 나가는 중이다. (물론 이는 좀 더 신중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고 사회 문화 심리학적인 관찰로 이어져야 한다.) 기독교 역시 새로운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사회의 중심에 설 수 없다. 신앙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다시 시험받는 순간일 수 있다.


기독교는 괜찮다. 다만 기독교인들이 괜찮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도, 신앙이 무엇인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신앙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히 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나열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독교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이런저런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을 나열한다고 해서 내가 좀 더 균형잡힌 지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상충하는 세부적인 욕망이나 방법론들이 상충한다. 더우기 인간 자체의 제한적인 인식의 한계와 왜곡도 존재한다. (즉 우리를 지배하는 배후의  막강한 믿음 - 기독교를 지적하면서 작동시키는 지배적인 신앙들을 우리는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  


기독교라는 종교의 체계는 결코 완벽한 신앙 체계가 아니다. 인간이 완전할 수 없는 것처럼. 신앙도 현실 속에서 언제나 불완전하게 구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불완전한 인간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길, 그것이 기독교다.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세상의 방식과 어긋나기 마련이다. 신앙은 세상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의 방식과 같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믿음은 언제나 세상과 어긋나는 법이다. 그것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 불편함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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