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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명 Feb 23. 2017

공간들

시간을 찍는 마음과 이순행의 사진들

사진과 관련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관습적으로 우리가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정지된 그림으로 나타날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굳이 우리가 정지된 이미지를 위해 굳이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사진은 그 ‘순간’을 잡아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사진 앞에서 정지된 체로 포즈를 취한다. 마치 우리가 멈춘 순간에야 비로소 사진도 정지된 화면을 잡아낼 것처럼. 


이것은 사진이 지닌 하나의 세계관이 알게 모르게 우리를 교육한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단지 순간을 잡아내지 않는다. 노출과 시간, 앵글이라는 기술적 과정을 거쳐 사실적인 이미지는 우리에게 제시된다. 그것은 순간을 표현하긴 했지만 시간과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어떠한 영속적인 이해가 담긴 본질의 세계를 말이다. 



이순행의 사진은 부산의 개발되지 않은 주택가나 건물 공간을 지속적으로 쫓아서 카메라로 담아내고 있다. 아직은 거리감을 가지기에 너무나 평이하고 익숙해서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가 흥미를 가지기엔 아무런 사건이나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주변부적인 공간과 텅 빈 벽들을 집요하게 반복하여 촬영된 그의 사진에서는 그러기에 오히려 관계없는 공간들을 이물감을 느끼며 눈길을 주게 된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는 아무런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사진은 늘 지나치거나 숨겨왔으나, 아무런 관련 없이 우리의 감성 일부를 지배하는 의식의 또 다른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 같이 보인다. 


비어있고 반복적인 형태들의 연속된 이미지들은 어쩌면 심미적 사진이라기보다는 깊은 무의식적인 지각과 인지 과정을 드러내 주는 시각적 그래프처럼 보인다. 그가 회화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났을 때, 이러한 그만의 독창적인 사진 찍기가 사건이나 순간이 아닌, 전의식적인 우리의 상태를 사진이라는 매개로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게 된다. 



지역의 공간과 주변부, 의미가 살고 있지 않은 곳이지만 가장 우리의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 맺고 있는 스치는 골목의 빈 여백을 통해 어쩌면 우리의 내면의 지워진 어떠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속적인 그의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그 사진들은 어떠한 순간들을 잡아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의 사진에 존재하는 어느 공간과 빈 벽들, 또한 그것을 채우는 창과 대문들이나 구조물들은 조형적으로 익숙한 방식으로 우리의 정체성과의 연관성들을 떠올려 준다.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에겐 이러한 조형성이 교육이나 학습을 우선해서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결정해 왔던 조건들이었으니까. 


서구의 미학으로부터 주류의 강한 트렌디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상태의 지역적인 구조물이 주는 심리적인 미학이 그곳 의식의 중심을 벗어난 언저리에 존재한다. 이것이 이순행의 사진을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비어있고 반복적인 형태들의 연속된 이미지들은 어쩌면 심미적 사진이라기보다는 깊은 무의식적인 지각과 인지 과정을 드러내 주는 시각적 그래프처럼 보인다. 그가 회화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났을 때, 이러한 그만의 독창적인 사진 찍기가 사건이나 순간이 아닌, 전의식적인 우리의 상태를 사진이라는 매개로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게 된다. 



고집스럽게 아날로그 카메라의 흑백 필름으로 촬영한 뒤, 수고스러운 인화 과정을 거치고 확대하여 프린트한 뒤 비로소 갤러리에 걸린 그의 작업을 보게 된다. 캔버스 같은 화면에 박힌 거친 필름의 망점을 가까이 확인하고 나면 사진의 화학적 물성에 관해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확실히 우리가 본 것들은 픽셀로 이루어져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영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은 순간도 아니었다. 무의식이 깊이 되새김하여 뱉어낸 어떠한 종류의 '사실들'이었다.      



우리는 늘 빈 공간과 여백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기에 아무런 미적 감상과 절실함으로 다가오지 않기에 우리는 기억에서 지운다. 어쩌면 한국의 골목길이나 지역 주변부를 살아내는 우리에게 이것들은 사실상 우리의 ‘유일한 것’ 일지도 모른다. 우리 내면의 감성과 의식의 뿌리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비어있는 작은 구석진 공간에서는 (이곳에서 만이 우리가 한때 실존했었다고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심적 상태들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들은 감각에 훈련된 우리에게 너무나 단조로와서 다른 무엇보다도 혹독하게 불편해질 수도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욕망의 뿌리가 제거된 객관적 관찰의 대상인 - 공간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이순행의 사진은 사실상 '우리가 본다'는 사실을 조금은 관조적인 태도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우리는 볼뿐만 아니라 주시한다. 뿌려지는 문자 언어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사진들은 주시하는 우리의 행위에 담긴 감각적인 반응과 관습을 제거한다. 하지만 내가 본 것들 속에서도 내가 있었다고 하는 본질적인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대상은 극사실적이고 구체적이지만 오히려 추상적인 '그림처럼' 변한 체 우리에게 기묘한 거룩함을 선사한다. 우리는 사진을 찍듯 내심 변하지 않는 본질의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듯이 생각한다. 공간들은 그제야 사진 속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처럼 정지한 체로 우리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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